발소리가 들린다. 이슬레이는 눈을 떴다. 창 밖은 아직 어두워 베개 옆을 손으로 더듬어 스마트폰의 화면을 확인한다. 깊은 새벽이었다. 세상을 감싸고 있는 빛도, 소리도 잠잠했다. 발소리는 사락사락 천이 쓸리는 소리와 함께 움직였다. 그것 만으로도 이슬레이는 발소리의 주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슬레이는 오늘 작고 마른 아이에게 중학교 시절 체육복을 빌려줬다. 아이의 체구에 비하면 한참은 큰 옷이었지만 그게 집 안의 가장 작은 옷이었다. 선생님이 바짓단을 세 번 정도 접어 올렸줬지만 워낙 마른 아이였기에 헐렁한 옷자락은 접어올린 무게를 못 이기고 원상태로 돌아왔다. 스위치를 누리는 소리에 이어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린다. 이슬레이는 상체를 일으킨 채 고민했다. 선생님은 주무시고 계신가. 나갈까, 말까. 이슬레이는 아이가 껄끄러웠다. 5학년이면 혼자 뭘 못할 나이는 아니고. 스르륵 기우는 머리가 벽에 닿는다. 찬 기운이 벽에 닿은 이마로부터 몸에 스며들었다. 꽤 긴 시간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을 닫는 소리도, 스위치를 누르는 소리도. 발소리도. 이슬레이는 몸을 일으켰다. 창 밖으로 들리는 자동차 소리만 가까웠다 멀어졌다. 방문을 열고 나오니 화장실 문이 작게 열린 채 주황색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슬레이는 조금 열린 문을 그대로 밀었다. 경첩이 울리는 소리에 놀란 듯 작은 등이 한번 튀어오른다.


 주황빛이 도는 빛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었다. 차가운 타일 바닥에 두 무릎을 붙이고, 한 손은 배를 꾹 누르고 있었다. 벌어진 입으로 힘겹게 숨을 쉬고, 땀에 젖은 옷은 등에 달라붙어 마른 굴곡을 그대로 보였다. 아이는 피곤한 얼굴로 이슬레이를 한번 힐끗 보더니 입안에 모인 침을 변기에 뱉었다. 그러고는 벽을 짚으며 겨우 일어나- 제 입가를 가린 채 고개를 한번 꾸벅 숙이고는 끝이었다. 아파하고, 짜증을 내고, 힘들어 해도- 울거나 도와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성깔 참. 이슬레이의 눈썹이 비뚤게 올라갔다.


 "...선생님은 안 깨셨죠?"


 조금 머뭇거리며 아이가 말했다. 내내 아이답지 않던 얼굴이 '선생님'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때는 제 나이처럼 변했다. 눈썹 끝을 내린 채 눈동자가 흔들린다. 눈 앞에 두고 있는 사람보다도 우선하게 되는 사람. 세상의 모든 것이 그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는 그런 기분.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그것은 이슬레이가 라이퀴아를 불편해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불편함이 창백한 얼굴의 어린애를 버려두게 만들지는 못했다. 자고 있는 선생님을 깨워 난리를 칠 만큼은 아니지만, 도와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다만 집에는 그럴싸한 상비약이 없었다. 선생님과 이슬레이, 두 사람 모두 집보다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었고, 약이 필요하다면 병원에 가는 편이었다. 잠에서 깼을 때 확인한 시간은 오전 3시 48분. 이슬레이는 소매를 걷어올리고 라이퀴아의 등을 툭 밀었다. 도와줄게.


 이슬레이의 손이 라이퀴아의 입 안으로 들어왔다. 작은 혀를 검지로 누르고, 그보다 긴 손가락이 목의 안쪽을 파고든다. 켁, 하고 목에 걸리는 소리와 동시에 아이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이슬레이는 기우는 몸의 허리를 낚아챘다. 우웩, 괴로운 소리를 내며 아이는 제 허리를 받히는 이슬레이의 팔을 끌어안았다. 힘이 풀린 다리는 꺾여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했고, 머리로 피가 쏠려 정신이 아찔했다. 제 풀에 놀란 듯 라이퀴아는 크게 뜬 눈에서 눈물을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듯 으, 으, 하는 소리만 가늘게 새었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가 입을 헹구게 하고는 뒷정리를 시작했다. 물을 내리고, 환기용으로 난 작은 창을 활짝 연다. 라이퀴아는 입을 헹구고, 지친 듯 세면대에 머리를 기댔다. 여전히 우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선생님한테는 비밀이에요. 이슬레이는 그 말에 대답을 피하며 화장실 나서려 했다. 이슬레이가 문고리를 잡기도 전에 열리는 문만 아니었다면.


 "무슨 일이야."

 "...제가 문에 부딪쳤네요."

 "아, 미안. 괜찮니?"


 이슬레이는 얼얼한 이마를 문질렀다. 한뼘이 조금 안되게 열린 문 틈으로 선생님의 얼굴이 보였다. 다른 일은 없는 거지? 바로 핵심을 찔러오는 질문에 이슬레이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곁눈질로 뒤를 보자 라이퀴아가 허둥거리며 제 검지손가락을 입술 앞에 붙이고 있었다. 쉿, 하는 소리에 선생님이 먼저 반응하며 문을 밀었다. 라이퀴아, 너 여기 있어? 이슬레이는 또 문에 부딪치는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한발 뒤로 물러났다. 벌써 냄새가 빠졌을 리 없으니- 화장실 안으로 들어온 선생님은 눈치챈 듯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거짓말을 한다고 속을 사람도 아닐 뿐더러, 이슬레이이게 라이퀴아의 비밀을 지켜줄 의리는 없었다.


 "쟤 체했나봐요. 얼굴 하얗게 질려서 다 죽어가던데."

 "뭐?"

 "?!"


 그렇게나 사람을 못 믿는다는 얼굴을 해 놓고는,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은 제법 재미있었다. 라이퀴아는 입을 벌린 채 이슬레이를 바라봤다. 무엇인가 말을 할 듯 말 듯 입술이 벙긋거린다. 라이퀴아, 선생님의 부름에 아이의 어깨가 튀었다. 선생님은 라이퀴아를 살피느라 이슬레이에게 뒷모습 만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 표정이 그린 듯이 선했다.


 "일단 토하게 만들었고, 열도 엄청 나ㅅ..."
 "비밀이랬는데!!!!"

 "난 약속 안했다."

 "라이퀴아, 왜 비밀로 하려고 한거야-"


 좁은 화장실에 세명의 목소리가 울리니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큰 목소리 낼 줄 아는구나, 하는 감탄을 속으로 삼키고 이슬레이가 능청스레 대꾸하자 라이퀴아는 분을 참지 못하고 발을 굴렀다. 선생님은 라이퀴아의 손을 잡고 눈을 맞췄다. 라이퀴아는 다정하게 제 이름이 불릴 때 마다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기분 잘 알지. 라이퀴아가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입을 크게 벌리고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선생님은 어쩔 줄 몰라하며 라이퀴아의 눈물을 훔쳐내다가,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너를 탓하는게 아니야, 미안해, 선생님이 몰라줘서 미안해. 이슬레이는 그 말이 역효과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예상대로 라이퀴아의 울음소리는 더 커졌다. 





 갈아 입힐 옷이 없다. 아이의 짐에는 약간의 속옷과 외출복 서너개, 그리고 책들이 전부였다. 이슬레이가 겨우 찾아낸 체육복은 이미 라이퀴아의 땀에 흠뻑 젖어 다시 입힐 수 없었다. 별 수 없이 적당한 반팔 라운드 티와 반바지를 챙겼다. 욕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슬레이는 헤어 드라이어와 옷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창백했던 아이의 얼굴에는 혈색이 돌아왔다. 높은 체온에 비누향이 유난히도 강하게 나는 것 같았다. 라이퀴아는 커다란 타월을 몸에 두른 채 선생님의 품에 안겨 있었다. 가늘게 뜬 눈가는 발갛게 짓무르고, 부어있었다. 작은 머리도 가누지 못해 이마가 선생님의 목덜미에 닿고, 머리카락 끝에 맺힌 물방울은 뚝뚝 떨어졌다. 선생님 옷도 꺼내둘까요. 응, 부탁할게. 선생님은 이슬레이에게서 옷을 받고, 능숙하게 라이퀴아를 고쳐 안았다. 옛날 생각나네- 하는 목소리에 마침 선생님의 옷을 들고 나온 이슬레이가 혀를 찼다.


 "저는 저 정도로 미련하지는 않았어요."


 선생님은 소리 없이 웃고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반쯤 졸고 있는 라이퀴아에게 옷을 입혔다. 물이 떨어지는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고, 몸의 물기를 털어낸다. 헐렁한 옷은 입히는 게 수월했지만 그만큼이나 쉽게 흘러내렸다. 상의가 워낙 커 어깨선이 팔뚝의 중간 쯤에 닿았고, 길이는 허벅지를 덮었다. 바지 밑단은 세 번을 접어 올리고도 자꾸 아이의 발에 밟히고, 흘러내렸다. 라이퀴아가 불편한 듯 바짓단을 툭툭 차는 시늉을 했다. 금방 잘거니까 참아, 이슬레이가 라이퀴아의 머리를 감싼 수건을 풀며 말했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수건을 치워두고 보송한 수건으로 부드럽게 머리를 매만진다. 따뜻한 바람이 라이퀴아의 얼굴에 닿았다. 헤어 드라이어의 소음 속에서도 아이는 꾸벅꾸벅 졸았다. 선생님은 라이퀴아의 몸이 뒤로 넘어가지 않게 제 몸에 기대게 만들었다. 이 시간에 그거 써도 되나? 깰 사람은 얘 울 때 깼을걸요. 나직한 목소리들이 부드럽게 오가는 것을 들으며 라이퀴아는 제 눈을 부볐다. 바람도, 선생님의 체온도, 오가는 목소리도 따뜻했다. 토닥토닥 일정한 리듬이 라이퀴아의 몸을 두드렸고, 라이퀴아는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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