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퀴아는 눈을 떴다. 얼마나 오래 잠들어있는지 모르게 시간이 지나 있었다. 잠들었다 깨어나기를 반복한 탓에 머리는 몽롱했다. 침대에 누운 상태로는 시계가 잘 보이지 않았기에 창가에 들어오는 빛으로 시간을 가늠할 뿐이었다. 창가는 밝게 빛이 들어오거나, 커튼이 드리워진 틈으로 가느다란 빛의 선을 만들거나, 어둠이 짙게 깔렸있었다. 라이퀴아가 또렷하게 눈을 뜰 수 있을 정도로 기운을 차렸을 때는 몇 번째인지 모르게 다시 어두워진 참이었다. 잠이 든 동안 땀을 너무 흘렸는지 몸은 묵직했다. 잠옷 또한 입고 잠들었던 자신의 것이 아닌, 이슬레이의 것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라이퀴아는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슬레이의 옷은 길어서 라이퀴아는 발뒤축을 끌며 걸었다. 라이퀴아는 벽 너머에서 자신을 찾는 소리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에 라이퀴아는 뻑뻑한 눈가를 문지르며 문고리를 한번 붙잡았다가, 이어서 들리는 이슬레이의 목소리에 손을 뗐다. 아직 이슬레이를 마주 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작은 몸이 서늘한 벽을 향해 기울어졌다. 등줄기를 타고 오소소 찬 기운이 올라왔다. 두 사람의 목소리는 의도적으로 낮추고 있는 듯 작았다.


 나직한 목소리는 벽을 넘으며 해체되어 단어 몇개만이 드문드문 남았다. 이슬레이의 목소리가 잠시 커지는가 싶으면 상냥하게 조곤거리는 목소리가 그를 달랬다. 라이퀴아가 기억하는 두 사람의 중요한 대화는 거의 그런 식이었다. 목소리를 크게 높이지 않고 단 둘이, 실수로라도 높아진 목소리에 라이퀴아가 놀라기라도 할까봐. 그 행동들은 무의식이었고 라이퀴아에게 있어 한없이 다정한 이유였지만 동시에 라이퀴아의 입을 틀어막기에는 충분했다. 라이퀴아는 어른들의 대화에 아무런 발언권도 없었고, 감히 자신이 말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이는 늘 그랬던 것 처럼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숨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꼭 나가야겠니? 자신이 했던 말과 꼭 같은 말을 하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라이퀴아는 입술을 악물었다. 내가 정말 선생님같은 말을 했구나, 하고 웃어야 할텐데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숨소리도 심장박동도 너무 크게 느껴졌다. 라이퀴아는 목 안쪽이 간질거리는 것이 기침으로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잠시 숨을 멈췄다. 열이 올라 먹먹해진 귀에 이명이 들렸다. 전 선생님과는 달라요. 귀울림이 숨소리와 심장이 뛰는 소리를 먹어치우고 이슬레이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했다. 라이퀴아는 자기도 모르게 문에서 한발짝 뒤로 물러났다. 심장소리는 점점 더 빨라지고 숨은 참을 수 없이 가빠져왔다. 라이퀴아는 선생님이 이슬레이를 붙잡기를 원했다. 그런다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셋의 관계에 대한 생각은 잠시 내려놓고, 조금 더 이슬레이에게 장난을 치고 선생님께 응석을 부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가족놀이 같은 거, 더는 못 해먹겠어요."


 라이퀴아는 이슬레이가 자기 자신을 향해 말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애초에 당신이랑은 달라요. 라이퀴아는 이슬레이가 선생님을 향해 당신이라고 부를 때,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인지 갈비뼈 안쪽이 아팠다. 라이퀴아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만할래요.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목소리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천천히 다시 침대를 향했다. 제 몸에 맞지 않는 바지가 척척 발에 채이며 라이퀴아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라이퀴아는 기어코 바짓단을 밟아 땅 위를 굴렀다. 침대 옆 낮은 서랍장에 라이퀴아의 무릎이 닿았고, 그 위에 놓여있던 약과 물컵은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에 라이퀴아의 몸이 바짝 굳었다. 라이퀴아는 두 사람이 아무런 소리를 듣지 못했기를 바랐지만 그 바람과 달리 다가오는 걸음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렸고 문 틈으로 밝은 빛이 들어왔다. 어두운 방 안에 익숙해져 있던 라이퀴아는 눈가를 조금 찌푸렸다. 라이퀴아, 자신을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에 라이퀴아는 등을 움찔거렸다. 움직이지 마, 유리 밟는다. 라이퀴아는 자신을 안아올리는 몸이 선생님인지 이슬레이인지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다. 다만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고 축축 늘어지는 몸은 무엇이든 기댈 것이 필요했다. 라이퀴아는 자신을 안아든 사람이 이슬레이가 아니기를 바라며 그 목을 끌어안았다. 라이퀴아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라이퀴아를 안아올린 사람은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어린 아이를 달래듯이 라이퀴아의 귓가에서 쉬쉬거렸고, 땀에 조금 젖어있는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세상에- 울었니, 라이퀴아?"


 라이퀴아는 선생님이 자신의 눈가를 쓸어내리며 물어보는 순간까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라이퀴아는 긍정이든 부정이든 선생님의 목소리에 대답하려 했지만 목에서는 마른 기침만 튀어나왔다. 커다란 손이 라이퀴아의 등을 부드럽게 다독였다. 선생님은 매달리는 데에도 힘이 없이 미끄러지는 라이퀴아의 몸을 능숙하게 한번 추어올렸다. 이슬레이, 내일 마저 얘기할까. 라이퀴아는 자신이 들을 이야기가 아니라는 듯 일부러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는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매달린 손에는 절로 힘이 들어갔고, 선생님의 셔츠에는 가느다란 주름이 잔뜩 생겼다. 괜찮아, 내일 병원에 가자. 지금은 더 자렴. 라이퀴아는 자신의 관자놀이에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을 느끼며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모든 과정은 이슬레이의 생각보다는 느리게, 라이퀴아의 예상보다는 빠르게 지나갔다. 이슬레이의 짐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책 따위는 졸업과 함께 대부분이 내다 버리는 것이었고, 옷들도 그의 성장을 따라가지 못한 것을 제외하면 몇 개가 남지 않았다. 이슬레이의 삶은 집안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으나 그것이 집안에 남은 전부였다. 이슬레이는 방 안에서 마치 이방인처럼 서 있었다. 새로 산 듯 보이는 롱코트는 마치 이슬레이의 몸에 맞춘 것 처럼 잘 어울렸다. 라이퀴아는 문지방에 서서 그런 이슬레이를 바라봤다. 이슬레이는 낯선 얼굴로 침대가 빈 공간과 옷장, 책상과 책장, 그리고 천장의 무늬까지 천천히 뜯어보고 나서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간이 올라가며 눈썹 위로 작게 주름이 생겼다. 아, 이제 다 후련하다.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그 목소리를, 그 웃음을 기억에 새기기 위해 눈을 떼지 않았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에게 고맙다고 속삭인 후에야 집을 떠났다. 가. 라이퀴아는 이슬레이를 처음 만난 그 날 처럼 선생님의 뒤에 제 몸을 숨긴 채 말했다. 잘이라는 수식어도, 형이라는 살가운 호칭도 떼어낸 작별 인사였다.





 소년은 자란다. 그는 이슬레이를 마중할 때가 되어서야 이슬레이의 키가 자신과 비슷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착이 늦어진 새 침대탓에 그와 같은 침대를 쓰고 있는 라이퀴아도, 많이 자라있었다. 처음 함께 잤을 때는 라이퀴아의 베개를 나린히 베고 누우면 발 끝이 허벅지에 닿을 정도였으나, 지금은 무릎이나 그 아래쪽에 닿을 것 같았다. 그는 불편하게 침대 가장자리에 바짝 붙어 누워있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동그란 뒤통수 아래로 마른 목줄기가 불편해보일 정도로 움츠러들어 있었다. 떨어지겠다. 그는 속삭이며 라이퀴아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아뇨, 선생님, 놀라 바둥거리는 것 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라이퀴아의 정수리를 턱으로 누르며 바둥거림을 제압하고 몸을 더 당겨 안았다. 라이퀴아는 많이 자랐지만, 여전히 조금 높은 체온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아직 미열이 남아있을 뿐 그 마저도 달라졌을지 모를 노릇이었다. 아이들이 언제 자라는지 모르게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쓸쓸하게 만들었다. 


 "쓸쓸해서 그래, 조금만 이러고 있자."


 라이퀴아의 움직임이 덜컥 멈췄다. 망설이는 것 처럼 라이퀴아는 조금 굼뜨게 바르작거리다가 곧 움직임을 멈췄다. 작은 몸은 금방 그가 힘으로 누르고 있지 않아도 될 정도로 힘을 빼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손에서도 힘이 빠졌다. 그는 자세를 고쳐 라이퀴아를 좀 더 부드럽게 안았다. 허리 앞에서 모아 깍지낀 두 손은 힘껏 끌어안은 것 보다 라이퀴아의 숨통을 틔웠다. 라이퀴아는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던 자세를 고쳐 몸을 돌렸다. 얌전히 자신에게 기대오는 작은 몸에 그는 머리를 쓸어넘겨주고, 뺨을 쓰다듬고, 목덜미를 매만졌다. 조금만 천천히 커. 그는 실없는 말을 하며 라이퀴아의 목덜미에 머리를 문질렀다. 마른 목덜미 아래로 맥박이 뛰는 소리가, 어쩌면 뼈가 자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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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이상적인 아이였다. 수려한 용모, 단정한 옷차림. 태도는 나긋했고, 우수하다는 수식어는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 아이의 행동이 주변 어른들의 눈에 거슬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그 애가 괜히 그랬겠어요'라는 말을 듣는 것이 이슬레이였다. 어른들의 상상 속 이상적인 아이. 주변에 모이는 사람은 끊이지 않았지만 투명한 벽이 있었고, 그 벽이 이슬레이에게 묘하게 압도적인 인상을 부여했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이슬레이는 만화나 소설 속에서 튀어나온 사람이라고 해도 믿겨질 정도였다. 스스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이용하기까지 했다. 사실상 이용하기 위해 모든 것을 쌓아왔다 해도 틀리지 않았다. 다만, 모든 것을 쌓는 과정이 어렵지 않을 정도로 우수했을 뿐. 지나치게 영리한 아이는 자신이 모르는 것이 없다는 착각에 빠지고는 했다. 부딪치고 깨질 구석이 없는 아이는 더욱 그랬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예민함을 좋아했다. 그것은 선생님과 아이들 사이를 나누는 분명한 경계였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사랑했고, 아이들 역시 그랬다. 선생님의 사랑은 너무도 다정했기에 아이들은 그 다정함에 매달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은 아이들만의 비밀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비밀은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다. 라이퀴아가 시비를 걸어온 동네 아이를 울린 일, 실수로 공방의 유리창을 깬 일 등- 작은 악행들은 모두 이슬레이만이 알고 있었다. 선생님에게는 쉽게 하지 못하는 투정도 이슬레이에게는 허락됐다. 라이퀴아는 여전히 사람을 경계하면서도 선생님과 이슬레이에게는 부드럽게 풀어졌다. 라이퀴아의 눈이 부드럽게 미소짓는 순간은 아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라이퀴아가 무게를 실어 팔에 매달리고, 장난을 치는 것은 오직 이슬레이 뿐이었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그런 모습을 알고 있는 유일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자신은 특별하다는 우월감. 라이퀴아에게 있어 선생님과는 다른, 중요한 존재라는 확신. 라이퀴아의 그런 태도는 이슬레이의 착각을 부추겼다. 이슬레이는 함부로 자신이 라이퀴아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라이퀴아는 자신과 다를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레이는 감히 라이퀴아가 상처받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슬레이는 함부로 라이퀴아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라이퀴아 또한 자신을 다 알고 이해할 것이라고.





 라이퀴아가 이슬레이의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교복이 담겨있는 종이가방만이 이슬레이의 걸음을 따라 흔들리며 한두번 부딪치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이슬레이의 몸에서 내려온 라이퀴아는 이 집에 처음 온 날처럼 조금 굳은 뺨으로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라이퀴아의 손은 이슬레이의 옷자락을 잡을 듯 뻗었다가 허공을 쥐며 멈추었다. 이슬레이는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가 외투를 걸어두었다. 라이퀴아는 현관에 걸터앉아 한박자 느리게 신발을 벗었다. 검은 눈동자가 특별할 것도 없는 현관을 의미없이 관찰했다. 이슬레이의 신발은 문 밖을 향해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현관의 센서등이 꺼지며 순간 어둠이 찾아왔다. 딸깍, 스위치를 누르는 소리와 함께 라이퀴아의 등 뒤가 밝아졌다. 뒤에서부터 뻗어진 커다란 손이 라이퀴아의 이마를 짚었다. 인기척에 현관 센서등에 다시 빛이 들어왔다. 라이퀴아의 이마는 조금 축축했다. 이슬레이의 손은 그대로 라이퀴아의 이마를 훔쳐내는 듯 하더니 둥근 뺨과 목덜미에 이어 손을 가져다댔다.


 "...열나네."


 검은 고수머리는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가 이슬레이의 손이 닿은 모양을 따라 헝크러졌다. 이슬레이는 멍하니 서 있는 라이퀴아의 몸을 잡아끌었다. 라이퀴아의 발에 반쯤 걸쳐져 있던 신발 뒷축이 끌리며 내팽개쳐졌다. 한번 타일 바닥에서 달각이며 튀어오른 신발은 가지런한 이슬레이의 신발을 밀어냈다. 한 짝은 이슬레이의 신발 앞에 가로놓이고 다른 한 짝은 이슬레이의 신발 위를 덮었다. 라이퀴아는 이슬레이가 라이퀴아의 외투를 벗겨내는 동안 그 신발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센서등이 꺼지고 나서야 라이퀴아는 고개를 돌렸다. 모양 좋은 눈썹이 조금 일그러진 채 라이퀴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손이 얼음장보다 더 차갑게 닿는 것을 깨닳고 나서야 자신의 열을 알아차렸다. 라이퀴아는 열 탓에 마른 입안을 혀로 훑었다. 입안에서는 조금 단내가 나고 있었다. 이슬레이는 어울리지 않게 부산을 떨며 욕실과 거실, 방 따위를 돌아다녔다. 욕실의 난방을 켜두고, 방에서 잠옷을 꺼내왔다. 오며가는 동안 틈틈이 라이퀴아의 이마를 쓸어내렸고 증세를 물었다. 라이퀴아와 눈을 마주칠 때면 서늘한 색의 눈동자가 얼핏 다정하게도 보이는 빛을 띄었다. 혼자 씻을 수 있겠어? 라이퀴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슬레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욕실로 향하는 라이퀴아의 뒤를 따랐다. 그러지마, 라이퀴아는 목소리를 내려고 했으나 열기를 띈 숨소리만 갈라진 채 새어나왔다. 결국 라이퀴아는 말 대신 욕실 안에 들어가 문을 걸어잠그는 것으로 대답했다.


 라이퀴아는 따뜻한 물을 머리 위로 끼얹었다. 개운한 기색 없이 물을 끼얹을 수록 몸의 열만 오르는 것 같았다. 어질어질한 머리 탓에 라이퀴아는 느린 동작으로 몸을 씻었다.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훔쳐내고, 머리를 털었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 탓에 몸에는 여전히 축축한 물기가 남아 있었고, 그런 상태에 입은 잠옷은 기분나쁘게 몸에 달라붙었다. 라이퀴아는 찝찝한 얼굴로 욕실을 나갔다. 거실에는 이슬레이가 꺼내둔 약과 물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라이퀴아는 그것들을 못본 척 하며 소파 위로 몸을 눕혔다. 머리가 복잡한 탓에 이슬레이가 있는 방으로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가 본질적으로 자신과 더 같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라이퀴아는 이슬레이도, 스승님도 아닌 라이퀴아였다. 스승님만큼 호인도 이슬레이만큼 이상적인 아이도 아닌 라이퀴아.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에게는 상처가 되지 않을 일에도 상처받을 수 있는 아이였다. 이슬레이에게 라이퀴아는 이해자였지만, 라이퀴아에게 이슬레이는 이해자가 되어주지 못했다. 형, 라이퀴아는 입 안으로 단어를 중얼거렸다. 이슬레이 형, 라이퀴아의 입술은 소리없이 달싹거리며 움직였다. 라이퀴아의 부름은 아무런 소리도 없었지만 그에 반응하는 것 처럼 방의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라이퀴아는 잠에 든 척, 눈을 감았다. 문의 경첩이 움직이는 소리, 다가오는 발소리,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조금 차가운 손.


 "약도 안 먹고, 머리도 안 말리고."


 작게 한숨소리가 들렸다. 라이퀴아의 등 뒤로 이슬레이의 팔이 들어왔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상체를 받쳐 안았다. 라이퀴아는 많이 자라고도 이슬레이보다 한참이 작았고, 가벼웠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를 앉혀둔 채 마른 수건과 헤어 드라이어를 가져왔다. 형, 라이퀴아가 눈을 뜨며 이슬레이를 불렀고, 이슬레이는 라이퀴아가 잠들어있지 않았다는 것에 놀라는 기색도 없이 대꾸했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머리 위로 마른 수건을 덮었다. 머리카락에서 방울져 떨어져 뺨을 적신 물을 꼼꼼하게 닦아냈다. 꺼내둔 약을 먹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라이퀴아는 알록달록한 캡슐과 이슬레이를 번갈아 바라봤다. 혼자서 아파야 하는데. 라이퀴아의 손이 꼼지락거리는 것에 따라 손 안에서 캡슐이 굴렀다. 


 "꼭 나가야 해? 우리는 가족이잖아"

 "선생님 같은 말을 하네."


 라이퀴아는 열에 목 안쪽이 마른 탓인지, 아니면 불안감 탓인지 쥐어짜내는 듯이 겨우 말했고, 이슬레이는 주저없이 대꾸했다. 이슬레이의 말에 라이퀴아는 입을 다물었다. 선생님과 자신은 다르다는 듯한 목소리. 라이퀴아는 선생님이 가족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순간들을 떠올렸다. 발 끝까지 온기가 도는 듯한 다정한 말. 이슬레이는 그 말들을 선생님 같다고 표현했다. 마치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한- 라이퀴아는 생각을 억지로 없애지도, 더 이어나가지도 않으며 약을 입에 머금었다. 너는 날 이해해 줄 거지? 이슬레이가 길에서 물었던 말을 라이퀴아는 다시 곱씹었다. 이해해주지 않는 나는 싫어? 라이퀴아는 그 생각을 말로 내뱉는 대신 약을 삼켰다. 이슬레이를 붙잡고 싶은 마음과 떠나려는 것에 대한 원망, 그런 원망에도 불구하고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혼란스럽게 섞여 들었다. 라이퀴아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마른기침만 했다.


 이 날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침대를 빌렸다. 본인은 원하지 않았지만 이슬레이가 억지로 라이퀴아를 자신의 침대에 잡아눌렀다. 발목 아프다며, 열도 나고 위험하니까 1층에서 자. 이슬레이의 말에 라이퀴아는 그 정도는 아니라며 잠시 몸부림을 쳤지만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어깨를 힘있게 잡아누를 뿐이었다. 이슬레이는 누운 라이퀴아의 옆에 잠시 앉아있었다. 서늘한 손이 약기운을 확인하며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이슬레이가 몸을 일으키자 매트리스의 용수철이 끼그덕거리는 소리를 냈다. 라이퀴아는 약기운이 올라 조금 몽롱해진 눈으로 이슬레이를 바라봤다. 이슬레이가 방 밖으로 나가는 뒷모습을 붙잡지 않기 위해, 이슬레이를 형이라 부르지 않기 위해, 투정을 부리지 않기 위해- 라이퀴아는 입안의 여린 살을 짓씹었다. 아직 어린 라이퀴아는 이제 혼자 아프는 법을 배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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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호인이었다. 따뜻했고, 다정했고, 함께 있으면 즐거운 사람이었다. 미련하게도 보일 만큼 부드러운 성정과- 그래도 상관 없을 만큼의 유능함이 있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평생을 굴곡 없이 살아온 인생이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부유하고 평화로운 가정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 어릴 때 부터 영특함을 보였고, 성인이 되어서도 승승장구 하고 있었다. 상냥한 성격 탓에 좋은 이유이든 나쁜 이유이든 주변에 사람이 많이 모였다. 모자란 것이 없었기에 나누는 것을 당연히 여기기도 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누구인가 비꼼을 담아 그렇게 말하기도 했지만 그는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일 뿐이었다. 그는 특별한 사명감이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모든 것에서 초연했고 이상하리만치 교과서적이었다. 그렇기에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동향의 오랜 지인 부부가 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후, 그는 부부의 아이를 받아들이기를 원했다. 부모의 장례식장에서 아이는 정장 대신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 아이의 기억에 그는 몇 번 인사를 나눈 사람일 뿐이었다. 같이 가자, 이슬레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부모의 초상을 끌어안은 아이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동정인가요? 아이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물었다. 피곤함이 서린 뺨에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 아이는 그를 올려다봤다. 상냥한, 그렇기에 속을 알 수 없는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의 대답은…


 이슬레이는 잠에서 깨어났다. 꿈은 미완성인 상태로 끝맺어졌지만 이슬레이는 그 대답을 기억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곱씹은 기억이었다. 그는 이슬레이가 필요하다 말했다. 갈 곳 없는 아이가? 어린 이슬레이는 그 의문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었다. 이용해도 상관없다는 의미였고, 상냥한 미소에 대한 각인이었다. 선생님은 가족을 원했다. 자라나는 이슬레이에게 선생님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들을 줬다. 이슬레이는 벅찰 정도로 쏟아부어지는 애정을 지탱하고자 그를 선생님이라 불렀다. 가족을 원하는 선생님에게는 야속한 일이었지만, 이슬레이는 그 호칭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확인했다. 이슬레이는 선생님의 이유도 이유 없이 쏟는 애정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특별하게 이슬레이가 비정한 성격인 것이 아니라- 타고난 성정이 달랐다. 선생님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호인이었다. 자신이 받는 것들이 모두 빚이 되어 이슬레이의 발목을 잡아 끌었다. 그렇기에 이슬레이는 좋은 아이가 되기 위해 애썼다. 선생님이 원하는 가족을 이루고, 라이퀴아를 동생으로 귀여워해주고 싶었다.


 "형, 아직 자?"


 라이퀴아가 이층침대 난간에 매달려 고개를 내밀었다. 위험하게,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이슬레이가 몸을 세우며 아프지 않게 라이퀴아의 이마에 박치기를 했다. 라이퀴아는 제 이마를 문지르며 아래로 드리웠던 상체를 일으켰다. 이슬레이가 이불을 정리하는 사이 라이퀴아는 사다리의 두어칸을 내려오다 중간즘에서 한꺼번에 뛰어 내려왔다. 발바닥 전체로 무게가 실려 가느다란 발목이 움찔 떨렸다. 그러다 다친다. 이슬레이가 한 손으로 라이퀴아의 두 뺨을 꾹 잡아눌렀다. 라이퀴아는 붕어처럼 입술을 삐죽 내민채 이슬레이를 올려다봤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와 눈을 마주친 뒤 발목을 향해 턱짓했다. 괜찮다는 말 대신 발목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라이퀴아는 메리메리와 레옹이 다니는 중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학교에서 보낸 우편물을 확인한 후 선생님은 옷장을 뒤졌다. 낯익은 블레이저와 바지에 이슬레이는 눈을 깜박였다. 이거 안 버렸어요? 이슬레이의 질문에 선생님이 부드럽게 웃었다. 옛날 생각나지- 이슬레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이 TV를 보고 있는 라이퀴아를 손짓으로 불렀다. 라이퀴아는 쪼르르 다가와서는 두 사람이 찾아낸 것을 확인했다. 라이퀴아가 들어갈 학교의 교복이었다. 이슬레이는 어려서부터 키가 큰 편이었고, 라이퀴아는 또래보다 작았다. 이슬레이가 입었던 교복 블레이저는 셔츠가 아니라 두툼한 맨투맨 위에 입었는데도 품이 남았다. 라이퀴아의 두 팔을 쭉 뻗게 만들자 소매 끝이 헐렁하게 늘어졌다. 바지는 입어볼 것도 없었다. 수선해도 못 입겠네. 선생님이 즐거운 어투로 말했다.


 "우리 막내는 언제 다 크지?"


 선생님은 라이퀴아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라이퀴아는 괴로운 듯 막힌 소리를 내며 고개를 바르작거리기는 했지만 억지로 품을 빠져나오지는 않았다. 장난스럽게 쪽쪽 소리를 내며 선생님의 입술이 라이퀴아의 이마에 기습적으로 닿았다 떨어졌다. 으악, 라이퀴아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비명을 질렀다. 팔락거리는 소매가 선생님의 등을 때렸다. 이슬레이는 소리없이 눈을 반짝이고는 슬쩍 다가섰다. 라이퀴아는 조금 과격한 손짓으로 제 얼굴을 향해 다가오는 이슬레이의 입가를 막았다. 도망치려 해도 등 뒤가 선생님에게 막혀 있었다. 선생님은 여전히 사람좋게 웃으며 라이퀴아도 이슬레이도 돕지 않았다. 이슬레이는 눈가를 가늘게 만들며 라이퀴아를 내려다봤다. 그대로 시선은 라이퀴아에게 고정한 상태로 이슬레이가 고개를 틀었다. 모양이 고운 옆선이 라이퀴아의 손바닥에 파묻혔다. 라이퀴아의 손가락에 축축한 살덩이가 닿았다. 놀란 라이퀴아가 손을 빼냈고, 자신을 막는 손이 사라지자 이슬레이는 얼굴을 바짝 붙여왔다. 그대로 라이퀴아는 코를 깨물리고 말았다. 라이퀴아의 발끝이 이슬레이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라이퀴아는 똑같이 놀림받더라도 선생님에게는 유난히 약했기에 이슬레이는 자신만이 얻어맞을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라이퀴아는 놀리는 재미가 있는 아이였다.


 라이퀴아는 자신이 놀림받은 것을 마음에 오래 담아두는 편이 아니었다. 선생님과 이슬레이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코 주위에 잇자국이 남은 채 사나운 표정으로 TV를 노려보는 라이퀴아를 내버려뒀다. 두 사람의 생각대로 라이퀴아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의 주제가가 두번째로 들릴 때 쯤에는 사나웠던 얼굴이 꽤 풀어져 있었다.


 "둘이 교복 맞추러 다녀와. 라이퀴아 기분 잘 풀어주고."

 "좀 억울하네요. 같이 했는데."


 하하- 선생님은 상쾌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네가 형이니까 편한거지. 선생님이 이슬레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올려다 봐야 했던 눈높이가 어느새 비슷하거나 조금 내려다봐야 할 정도로 자랐다. 선생님은 라이퀴아에게 했던 것 처럼 이슬레이의 몸도 끌어안았다. 동생 잘 돌보고. 제 귓가에 속삭여지는 말에 이슬레이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동생. 이슬레이는 그 단어를 한번 곱씹었다. 괜히 입안의 치열을 혀로 훑었다. 선생님은 이슬레이의 대답이 들리지 않는 것에 아무런 의구심도 품지 않았다. 라이퀴아, 선생님 간다- 라이퀴아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마중을 나왔다. 선생님은 여상스럽게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토라진 채 마중하기에는 이번 출장은 며칠이 걸렸다. 라이퀴아는 선생님의 품으로 안겼다. 다녀오세요. 선생님의 입술이 라이퀴아의 관자놀이에 닿았다 떨어졌고, 이번에 라이퀴아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마른 팔이 선생님의 목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앞으로 자랄테니 조금 크게 사는게 좋아요. 종업원은 유난히도 사근사근하게 말하며 이슬레이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라이퀴아는 측은함을 가득 담은 얼굴로 종업원을 바라봤다. 이슬레이는 종업원의 말에 적당히 대꾸하며 딱 맞는 교복의 치수를 확인했다. 그냥 형 입던거 물려입어도 되는거 아냐? 종업원이 한 치수 큰 옷을 가지러 간 사이 라이퀴아가 이슬레이의 귓가에 속삭였고 이슬레이는 어림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괜히 오기가 붙은 라이퀴아가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한 치수 큰 사이즈를 고르고도 라이퀴아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저녁은 라이퀴아를 달래기 위해 라이퀴아가 메뉴를 정했다. 라이퀴아는 식사보다도 달달한 간식에 관심이 많았다. 후식이 딸려오는 패밀리 레스토랑을 고를 것을 이슬레이는 일찌감치 눈치채고 있었다. 라이퀴아는 자연스럽게 메뉴판의 디저트 코너를 펼쳤고, 이슬레이는 그것을 몇 페이지 앞으로 넘겼다. 라이퀴아는 필라프와 파스타를 각각 하나씩 두고 고민했고, 두 개를 모두 시켰다. 라이퀴아는 한껏 불쌍하고 귀여워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메뉴판 하단의 레몬에이드도 짚었지만 이슬레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디저트도 먹을거잖아, 자꾸 단것만 먹으면 안돼. 이슬레이가 살짝 라이퀴아의 코를 꼬집었다. 이럴때만 선생님 흉내야, 라이퀴아가 코맹맹이 소리로 불만을 터트렸다. 테이블 앞에 서 있던 웨이트리스는 몰래 웃으며 주문을 받아적었다. 식당 안에는 손님이 그리 많지 않았던 탓인지 요리는 빠르게 나왔다. 이슬레이는 먼저 라이퀴아의 앞접시에 음식을 덜어줬다. 라이퀴아는 예의 바르게 잘먹겠습니다- 하는 인사를 하고는 포크를 들었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가 충분히 음식물을 섭취할 때 까지 기다렸다. 딱히 입맛이 없었고, 밖에서 하는 식사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몇번 먹는 시늉을 하다 손을 뗀 채 라이퀴아의 식사만 구경하고 있었다.


 너한테는 먼저 말해야 할 거 같아서 그러는데. 이슬레이의가 턱을 괸 채 무덤덤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나 곧 나갈거야."


 이슬레이의 말에 라이퀴아가 분주하게 움직이던 턱을 멈췄다. 라이퀴아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스푼 끝이 그릇을 긁고, 라이퀴아는 겨우 입안의 음식물을 삼켰다. 이슬레이의 최대 이해자는 선생님이 아닌 라이퀴아였다. 두 사람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단순한 몸짓으로 서로의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 처럼,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말 속에 숨은 의미를 알아차렸다. 이슬레이는 집이 아닌 '가족'을 나가려 하고 있었다. 이슬레이와 라이퀴아는 의심이 많았고, 자신에게 쏟아지는 호의에도 한발짝 물러나는 아이들이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이유 없는 온기를 받을 때면 부담만 커질 뿐이었다.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생각을 이해했다. 정확한 생각을 모두 꿰뚫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슬레이의 부채감은 이해하고 있었다. 라이퀴아는 대꾸 없이 스푼 끝을 씹었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손을 잡아끌어 스푼을 잘근거리지 못하게 하고, 입가를 한번 닦아줬다. 손가락에 스친 입술은 부드러웠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입술이 닿은 손가락을 매만지지 않기 위해 의식하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라이퀴아는 그대로 스푼을 내려놨다. 디저트 시킬까? 이슬레이의 물음에 라이퀴아는 고개를 저었다. 집에 갈래.


 식당을 빠져나온 라이퀴아는 조금 느리게 걸으며 이슬레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보폭이 차이나는 탓에 라이퀴아가 조금 속도를 늦춘 것 만으로도 거리는 금방 멀어졌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라이퀴아는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 형- 이라고 자꾸만 튀어나오려는 목소리를 안으로 삼켰다. 라이퀴아는 부르지 않았지만 이슬레이는 얼마 걷지 않아 뒤를 돌아봤다. 지는 노을 탓에 이슬레이의 몸 가장자리로 붉은 선이 생겼다. 풍경과의 괴리를 만들며 이슬레이가 라이퀴아에게 다시 다가왔다.


 "형, 나 발목 아픈거 같아."


 라이퀴아는 자신의 통증인데도 애매하게 흐리는 말투를 썼다. 이슬레이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라이퀴아의 앞에 한 쪽 다리를 꿇고 몸을 숙였다. 오히려 놀라 움찔하는 라이퀴아의 다리를 붙잡는다. 운동화를 벗기고 바지자락을 걷어올렸다. 라이퀴아의 발목은 거의 한 줌이었다. 멍도 부어오른 기미도 없었지만 가느다란 발목이 움찔움찔 떨리고 있었다. 사다리에서 뛰어내리지 말라니까. 이슬레이가 라이퀴아의 발목을 문지르며 잔소리했다. 라이퀴아는 제 앞에 보이는 이슬레이의 어깨에 손을 기댔다. 안 나가면 안돼? 라이퀴아가 반쯤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라이퀴아도 선생님처럼 가족을 원하고 있었다. 이슬레이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슬레이는 부드러운 손길로 라이퀴아에게 다시 신발을 신겨줬다. 무릎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는 몸을 일으킨다.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얼굴을 마주보지 못하고 제 발끝만 노려봤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마른 등을 어루만졌다. 라이퀴아, 너는 날 이해해 줄 거지? 그 말에 라이퀴아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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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퀴아가 가족의 틀에 들어온지 두 해가 되어가는 겨울이었다. 아이의 깡마른 몸에는 살이 붙었고, 처음 가져왔던 옷들은 길이가 깡총해져 더 이상 입을 수 없었다. 여전히 또래보다 작고 가벼운 덩치였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눈치를 살피느라 분주하게 눈을 굴리는 습관은 없어졌고 대신 눈가를 가늘게 만들며 웃고 다녔다. 너 점점 선생님 닮아간다, 이슬레이가 지나가듯 하는 말에 라이퀴아는 더 활짝 웃고는 했다. 스피어 나이츠 공방 아이들의 손에 반쯤 억지로 이끌려 친구들도 생겼다. 대부분은 알음알음 인사만 하는 사이였지만 일부러 거리를 두기 위해 얼굴을 굳히는 일도 없었다. 메리메리와 레옹이 먼저 졸업을 해 교복을 입게 된 이후로는 주로 엑스트라와 같이 다녔다. 게임에 능숙해진 라이퀴아가 신기록이라도 내는 날에는 한동안 주인공의 호칭이 라이퀴아의 뒤를 따라다녔다. 비숍, 영웅, 용사님- 라이퀴아가 민망함에 몸서리를 쳐 봤지만 그만두기는 커녕 공방 전체가 따라 라이퀴아의 별명을 외쳤다. 종종 반찬을 나눠주러 공방을 찾아오는 에피타이저만 그 놀림에 참가하지 않았기에 라이퀴아는 에피타이저의 뒤에 딱 붙어있고는 했다.


 에피타이저는 아이들을 썩 잘 돌보는 타입이 아니었지만 항상 인기가 좋았다. 귀찮아! 소리를 지르며 집어던지거나 기술을 거는 날도 많았지만 크게 다치는 경우는 없었고, 오히려 아이들은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들이 눈을 빛내며 조르면 기술을 알려주기도 했다. 라이퀴아가 유난히 에피타이저를 따르는 탓에 삐죽거리는 메리메리도 그럴 때는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이거 배워서 사람 패고 다니면 맞는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에도 아이들은 싹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날도 라이퀴아는 에피타이저에게 새로운 관절기를 배우고, 가장 빨리 요령을 익혔다. 한동안 영웅이라고 불리며 놀림받은 것에 대한 복수로- 라이퀴아는 와루캥이 가져다 준 간식을 와작거리며 다른 아이들이 애쓰는 모습을 구경했다. 


 레옹이 복수전을 성공하기 전에 라이퀴아는 자리를 떴다. 곧잘 있는 일이었다. 주말이면 라이퀴아는 점심시간 전후로 집에 돌아갔다. 이슬레이는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었고, 많은 시간을 책상 앞이나 도서관에서 보냈다. 단 한 번도 집안일을 안하겠다는 말은 안했지만 어련히 선생님과 라이퀴아가 이슬레이 몫의 일을 빼앗고 있었다. 평소라면 알아서 한다며 날을 세웠을 이슬레이도 중요한 시험을 앞둔 시점에는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그 시험은 몇일 전에 끝났지만 이제 막 짐 하나를 덜어둔 사람에게 바로 일을 맡기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다.


 "다녀왔습니다-"


 라이퀴아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인사했다. 선생님은 연말이면 항상 바빴고, 이슬레이도 시험이 끝나고 처음 맞은 주말이니 어디론가 외출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라이퀴아의 예상대로 대답은 들리지 않았지만 현관에는 이슬레이의 신발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라이퀴아는 고개를 갸웃하고 신발장을 열었다. 다른 신발들도 제 자리를 차곡차곡 지키고 있었다. 라이퀴아는 던지듯이 신발을 벗어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이슬레이가 책상 앞에 앉아 이마를 짚고 있었다. 형, 귀가 좋은 이슬레이가 자신의 인사를 못 들었다는 것이 이상해 라이퀴아는 이슬레이를 불렀다. 의자에 앉아있던 이슬레이의 몸이 반쯤 돌아갔다. 언제 왔어, 이슬레이의 목소리는 조금 갈라져 있었다. 라이퀴아는 잰걸음으로 이슬레이에게 다가서 이마에 손을 얹었다. 확연히 알 정도로 체온이 높았고,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라이퀴아는 그대로 이슬레이의 팔을 잡아 끌었다. 방 안에 있는 책상에서 침대로 이동하는 것 뿐인데도 이슬레이의 걸음이 갈지자를 그렸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가 이끄는 대로 침대에 걸터앉아 색색 숨을 몰아쉬었다.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옷장을 뒤져 편한 옷을 꺼내 이슬레이에게 집어던졌다. 평소라면 모양 빠지게- 라며 한마디를 했을 이슬레이가 암전히 옷을 받아들었다. 미련하게. 라이퀴아는 자신이 끙끙 앓을 때 마다 들었던 말을 그대로 이슬레이에게 돌려줬다. 이슬레이는 아무런 말도 없이 땀에 젖은 셔츠의 단추를 끄렀다.





 라이퀴아는 곧잘 병치레를 했다. 그리고 아픈 것을 잘 티내지 않는 편이었다. 혼자 끙끙 앓다가 이슬레이나 선생님에게 들켜 혼나고는 했다. 안타깝게도 들키지 않은 적은 없었다. 선생님은 아프면 바로 아이들에게 말을 하고 혼자 추스르는 타입이었고, 들키지 않은 것인지 정말 한번도 아파보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으나- 이슬레이는 좀처럼 아프지 않았다. 아프기 이전에 흐트러진 모습도 드물어서 라이퀴아는 조금 흐트러진 이슬레이의 모습이 신기했다. 라이퀴아의 잔병치레 탓에 상비약은 항상 넉넉했다. 가장 좋은 것은 병원에 가는 것이겠지만- 방 안에서 움직이는 것도 비틀거리는, 머리 하나 이상은 더 큰 사람을 병원까지 데려갈 재주는 아직 초등학교 6학년인 라이퀴아에게 없었다. 선생님에게도 연락을 넣어 봤지만 전원이 꺼져있다는 목소리만 휴대전화 너머로 전해졌다.


 설거지 통이나 식기 건조대나 무언가를 해 먹은 기색은 없었다. 라이퀴아는 일단 물과 이온음료를 가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슬레이는 아픈 와중에도 반듯하게 앉아있었다. 미간이 조금 찌푸려진 채 마른 숨소리만 일정하게 낸다. 라이퀴아가 침대 가에 앉아 매트릭스가 흔들리자 그제서야 이슬레이의 눈이 뜨였다. 라이퀴아가 물을 따서 넘기자 이슬레이는 느리게 그것을 마셨다. 삼키기도 힘겨운 듯 목울대가 크게 한번 움직이고 멈추기를 반복했다. 상태를 봐서는 뭔가를 먹는 것도 힘겨워 보였지만 빈 속에 약을 먹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점심은-"

 "자꾸 들락거리지마. 옮는다."


 라이퀴아의 말을 끊고 이슬레이가 내쫓는 손짓을 했다. 내가 그런 말 할때는 눈도 깜박 안했으면서. 라이퀴아는 불퉁한 얼굴로 방을 빠져나갔다. 라이퀴아가 나가고 나서야 이슬레이는 입을 가리고 밭은기침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다시 열렸다. 들어오지 말라니까, 이슬레이의 잔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라이퀴아가 옆에 앉았다. 상비약과 부드러운 빵이 쟁반에 놓여 있었다. 아주 잠깐 죽이나 스프 같은 것을 직접 요리할까 했으나 라이퀴아는 그런데에 재주가 없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정성을 쏟기에는 자신을 쫓아내는 이슬레이가 얄미웠다. 먹는거 볼 때까지 안나가. 라이퀴아가 빵을 이슬레이의 입가에 들이밀며 말했다. 이슬레이는 얼굴을 잠시 일그러트렸다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그 빵을 받아먹었다. 목 안쪽이 마른 탓에 음식을 씹어 삼키는 것이 힘겨웠다. 잘했어, 라이퀴아가 입을 벌리며 소리없이 웃었다. 눈매가 부드럽게 휘는 모양이 점점 선생님을 닮아가고 있었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가 건네는 약을 받아 입에 머금었다.


 "알아서 먹어, 이제 나ㄱ-"

 "내가 걱정 돼?"


 그걸 말이라고- 이번에는 역으로 제 말이 끊긴 이슬레이가 불쾌한 표정으로 물과 약을 삼켰다. 물을 아무리 마셔도 갈라진 목소리는 잘 돌아오지 않았다. 너 감기에도 엄청 앓잖아, 오늘은 선생님 방에서 자. 이슬레이의 말을 한 귀로 넘겨 들으며 라이퀴아가 이슬레이의 어깨를 눌렀다. 알았어. 알았으면 나가. 형도 나 아플때 꼭 안 나갔잖아. 의미없는 투닥거림이 오가고 라이퀴아는 억지로 눕힌 이슬레이의 몸에 이불을 잘 덮어줬다. 자는 것만 보고 나갈게.


 누구를 닮았는지. 이슬레이가 한숨처럼 말하고는 눈을 감았다. 라이퀴아는 웃으며 빈 페트병과 남은 빵 따위를 한데 모았다. 모두 자신이 받은 일들이었다. 라이퀴아는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누군가를 닮아간다 표현한다면 라이퀴아는 두 사람을 모두 닮아가고 있었다. 열을 재는 조금 서늘한 손, 상냥하지는 않지만 성가실 정도로 신경을 쓰는 태도, 열이 내려 눈을 떴을 때 눈에 보이는 다정한 얼굴. 선생님이라고 생각했던, 열에 들떠 정신이 없는 와중에 맞잡은 손의 온기가 이슬레이 였을 때는 라이퀴아도 조금 놀랐었다. 라이퀴아는 살짝 이슬레이의 손을 잡았다. 옮는다니까, 피곤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이슬레이가 중얼거렸다. 이슬레이는 닿은 손을 한번 꽉 쥐었다 놓았다. 이내 이슬레이의 호흡이 일정해졌다. 라이퀴아는 조심스럽게 이슬레이의 눈 앞에 손을 흔들었다. 평소라면 잠든 와중에도 금방 깨겠지만, 열과 약기운 탓인지 이슬레이는 꼼작도 하지 않았다.


 형, 이제 누가 안봐도 나한테 다정한거 알아? 라이퀴아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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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퀴아가 비에 흠뻑 젖어 귀가한 후 이틀이 지난 주말이었다. 고소한 빵 굽는 냄새에 라이퀴아는 눈을 떴다. 잘 뜨이지 않는 눈을 비비며 침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간다. 이슬레이는 이미 활동을 시작했는지 아래층 침대는 이불이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방 밖에서 일정하게 말소리가 들리는 것이 선생님도 깨어있는 듯 했다. 라이퀴아의 예상대로 두 사람은 부엌에 있었다. 이슬레이는 식탁 앞에 앉아 빵을 씹고 있었고, 선생님은 토스트기의 타이머를 돌리던 참이었다. 저녁 전에는 들어올게요. 그래, 바래다줄까? 아뇨, 오늘 인사 가신다면서요-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목소리들이 라이퀴아의 등장에 끊겼다. 선생님이 먼저 라이퀴아를 알아차리고 시선을 돌리자 이슬레이의 얼굴도 따라 움직였다.


 "라이퀴아, 잘잤어?"

 "어제 늦게 자더니, 일찍 일어났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라이퀴아는 인사에 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이슬레이는 늘 그랬듯이 이른 아침 같지 않은- 말끔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버터, 사과잼. 이슬레이의 말에 라이퀴아가 손가락으로 사과잼 병을 가리켰다. 이슬레이는 먹던 빵을 입에 문 채 토스트에 사과잼을 바르기 시작했다. 사과 알갱이가 노랗게 반들거리는 것이 먹음직스러웠다. 라이퀴아는 그 빵이 접시에 담겨 제 앞에 내밀어질 때 까지 이슬레이의 식사를 신기한 듯 바라봤다. 어떻게 안 흘리지. 라이퀴아가 최대한 이슬레이의 흉내를 내며 조심스럽게 빵을 한 입 베어물었다. 하얀 접시 위에 노릇한 부스러기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우유를 주러 다가온 선생님이 라이퀴아의 입가를 닦아줬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가 빵을 반 쯤 먹어치웠을 때 먼저 일어났다. 라이퀴아가 다급하게 빵을 씹어 삼키고 조금 멘 목소리로 인사했다. 다녀오세요.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머리를 한번 헤집듯이 쓰다듬고는 집을 나섰다. 선생님은 라이퀴아가 식사를 하는 동안 앞치마를 벗고 차를 마셨다. 라이퀴아는 차의 향이 선생님과 꽤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평소 주말과 달리 잘 차려입고 있었다. 오늘도 나가세요? 라이퀴아가 조금 쓸쓸한 얼굴로 컵을 만지작거렸다. 너도 가야지. 선생님이 찻잔을 들어올린 채 말했다. 아침식사의 설거지는 조금 미룬 채 두 사람은 나갈 채비를 했다. 선생님은 손에 종이가방 두개를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 라이퀴아의 손을 잡았다.


 밖은 몇일 전의 폭우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좋은 날씨였다. 편의점은 아침이라고 특별히 더 분주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새벽부터 아침 타임을 맡은 에피타이저의 얼굴에는 피곤이 가득했다. 종이 울리는 소리에 에피타이저는 반사적으로 인사를 했다. 에피타아저는 선생님의 얼굴을 보고 긴가민가한 표정을 하더니 그 옆에 매달린 라이퀴아를 보고 아는 체를 했다. 라이퀴아는 쭈뼛거리는 움직임으로 에피타이저에게 다가섰다. 에피타이저는 피곤한 기색을 최대한 숨기고 상체를 숙여 시선을 맞췄다. 굉장한 말이라도 하는 것 처럼 라이퀴아는 긴장하고 있었다.


 "두유 맛있었어요."

 "푸핫"


 에피타이저가 웃음을 터트렸다. 선생님은 몇번이고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했고 에피타이저는 손사랫질을 했다. 이럴 때만 손님이 없지, 에피타이저는 불만의 말을 겨우 삼키며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가벼운 인사가 오갔다. 애가 단걸 잘먹던데요. 에피타이저는 별 의미 없이 말했지만 선생님의 웃음이 잠시 멈췄다. 그런 내색 한 적 없는데- 선생님은 제 굳은 뺨을 문질렀다. 라이퀴아는 쓸데없이 생각이 많고, 좀처럼 좋고 싫음을 표현하지 않는 아이였다. 에피타이저는 선생님의 표정에 자신의 말 중 실수가 있었나 되짚어 봤지만 짐작이 가는 것은 없었다. 물론 에피타이저의 잘못은 없었다.


 "얘한테 과자 사 준 오빠는 오늘 안와요."


 에피타이저는 능숙하게 대화의 공백을 모르는 척, 화제를 돌렸다. 선생님의 옷자락을 붙잡은 채 얌전히 어른들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라이퀴아가 반응을 보였다. 라이퀴아는 에피타이저의 얼굴을 한번 바라봤다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내렸다. 선생님이 움츠러든 라이퀴아의 어깨를 도닥였다. 에피타이저는 그런 라이퀴아를 보더니 펜과 남는 영수증 하나를 잡더니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한번 여기로 가보세요. 에피타이저가 그린 것은 편의점과 놀이터를 중심으로 한 주변 약도였다. 놀이터의 뒷 편, 얼마 멀지 않은 위치에 별표가 그려졌다. 스피어 나이츠 공방. 동네 사람이라면 오며가며 한번쯤 본 것 같은 기억이 있는 이름이었다. 공방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유능하고 촉망받는 인재인지 여부는 둘째치고- 아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유명하기도 했다. 주택가 한가운데, 탁 트인 낮은 담이라는 조건 덕분에 어른들도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오빠 여기서 지내거든요. 에피타이저가 선생님에게 약도를 건내며 말했다. B초등학교에서 방과후지도하는 사람도 있고, 애들도 많고. 선생님은 에피타이저의 설명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약도를 바라봤다. 사양하는 에피타이저에게 선생님은 끈질기게 종이가방을 건냈다. 그 형 한테도 과자 맛있었다고 말해. 편의점을 나서는 라이퀴아에게 에피타이저가 손을 흔들며 외쳤다.


 스피어 나이츠 공방은 그리 멀지 않았다. 낮은 담에 대문이랄 것이 없이 탁 트여 있었다. 덩치가 큰 남자의 목마를 타고 있던 아이가 먼저 선생님과 라이퀴아를 알아차렸다. 하늘색 머리의 아이는 다리를 까닥거리더니 몸을 앞으로 확 숙였다. 떨어질 것처럼 기울어진 몸을 남자는 능숙하게 받았다. 손님! 알았어- 위험하니까 너무 숙이지 마. 남자는 아이를 제 어깨에서 내리며 말을 덧붙였다. 아이는 제 또래처럼 보이는 라이퀴아를 물끄러미 보더니 건물 안으로 달려가 버렸다. 엑스트라, 인사! 남자가 외쳤지만 돌아보는 기색도 없었다. 남자와 선생님은 어색하게 서로 고개를 숙였다.


 "전에 우리 아이가 신세를 졌다고 들었습니다."

 "네? 아, 아아. 일단 들어오세요."


 남자, 와루캥은 라이퀴아에게 살갑게 웃으며 말했다. 라이퀴아는 와루캥이 손을 흔들어주고 나서야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와루캥은 두 사람을 건물 안으로 안내했다. 건물 안으로 사라졌던 엑스트라는 분홍색 곱슬머리를 한 여자아이와 노란 머리의 남자아이를 데리고 문가에서 라이퀴아를 훔쳐보고 있었다. 쟤 걔 아냐? 놀이터에서 책 읽는- 메리메리가 말 걸고 싶어서 안달났던 애. 이름으로 막 부르지 말랬지. 분홍색 머리의 아이가 엑스트라에게 짜증을 부렸다. 노란 머리의 남자아이는 미간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라이퀴아는 아이들을 무시하려 했지만 노골적일 정도로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에 겨우 '안녕'하고 두 음절을 내뱉었다. 메리메리라는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라이퀴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같이 놀자. 라이퀴아는 곤란한 얼굴로 선생님을 올려다 봤지만 선생님은 말갛게 웃는 얼굴로 라이퀴아를 마주 볼 뿐이었다.


 라이퀴아는 아이들의 손에 2층으로 끌려갔다. 선생님과 와루캥, 그리고 건물 안에 있던 다른 어른들은 말리는 기색이 없었다. 새 친구? 응. 날씨 좋으니까 밖에서 놀지? 레옹이 가져온 게임 같이 하려고. 그래, 화면 너무 가까이서 보면 안된다. 라이퀴아는 그대로 화면 앞에 앉았다. 게임을 처음 해본다는 라이퀴아의 말에 아이들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옹과 라이퀴아가 나란히 컨트롤러를 잡고, 라이퀴아에게 게임을 알려준다는 핑계로 메리메리가 반대쪽 옆에 앉았다. 어른들에게 간식을 받아온 엑스트라는 레옹과 라이퀴아의 뒤에 자리를 잡았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라이퀴아는 불편한 얼굴로 컨트롤러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아이들은 끈질기게 라이퀴아의 옆에 붙어있었다. 라이퀴아는 적당히 피하기를 포기하고 게임에 집중했다. 라이퀴아가 연패를 반복하는 동안 레옹과 메리메리, 엑스트라가 번갈아가며 옆자리를 채웠다. 나 언제까지 해? 라이퀴아가 두번째로 엑스트라와 맞붙게 됐을 때 물었다. 한번은 이겨봐야지! 엑스트라가 개구지게 웃으며 대꾸했다. 메리메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라이퀴아의 입에 간식을 넣어줬고 레옹은 부러운 듯 그 모습을 바라봤다. 라이퀴아는 요령이 좋은 편이었고, 금방 게임기를 다루는 것에 능숙해졌다. 첫 승리는 레옹에게서 따냈다. 메리메리가 라이퀴아를 끌어안았고, 레옹과 엑스트라도 와아- 환호성을 터트렸다. 라이퀴아는 얼떨떨한 얼굴로 자신의 캐릭터가 승리 포즈를 취하는 것을 바라봤다. 축하해, 아이들의 말에 라이퀴아의 뺨이 사르르 풀어졌다. 시끄러운 방안에 노크소리가 울렸다. 살짝 열린 문 틈으로 선생님의 얼굴이 보였다. 라이퀴아는 게임기를 내려놓고 선생님에게 다가갔다. 어느새 시간은 꽤 지나 있었다. 아이들이 아쉬움에 원성을 내뱉었고, 선생님은 미안한 듯 눈썹 끝을 내리며 미소지었다. 아이들은 굳이 내려와 돌아가는 라이퀴아를 배웅했다.


 "다음에 또 놀러와!"





 이슬레이는 아침에 말한 대로 저녁시간이 되기 전에 돌아왔다. 무슨 일인지 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반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슬레이는 허공에 다녀왔다는 인사를 하고는 가방을 풀었다. 저녁 만드는 중인가, 시간을 확인하고 부엌으로 들어가니 선생님과 라이퀴아가 나란히 소매를 걷어올린 채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저녁 메뉴는 햄버그 스테이크로 보였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뒤로 다가가 앞치마 끈을 풀었다. 형, 언제 왔어? 라이퀴아가 고개만 돌려 이슬레이를 바라봤다. 방금. 간단하게 대꾸한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에게 손을 씻게 하고는 자신이 대신 앞치마를 맸다. 선생님은 기분이 좋아보였다. 생글거리는 웃음은 항상 있는 것이었지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것은 드물었다. 굽는 건 제가 할게요.


 "무슨 좋은 일 있었어요?"


 이슬레이의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선생님의 웃음이 한층 더 깊어졌다. 라이퀴아한테 친구가 생겼어. 이슬레이는 그것이 이렇게나 신날 일인가 잠시 고민했다. 정작 라이퀴아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잘 익은 햄버그 스테이크를 담아 각각의 자리에 뒀다. 세 사람은 자리에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라이퀴아 친구 생겼어?"
 "...아마도?"


 선생님의 말과 달리 라이퀴아는 애매한 태도였다. 오늘 즐거웠지? 선생님의 물음에 라이퀴아는 분주하게 움직이던 입을 멈췄다. 동그란 눈동자가 생각에 잠겨 가라앉고, 고개가 기울어졌다. 이내 라이퀴아의 양 뺨이 빨갛게 물들고 눈가가 한껏 부드럽게 휘어졌다. 대답 대신 라이퀴아의 고개가 한번 끄덕였다. 사랑스러운 웃음에 선생님이 라이퀴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슬레이는 불퉁한 얼굴로 라이퀴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라이퀴아는 민망함을 숨기려는 듯 다시 분주하게 손과 입을 움직였다. 그러면 오늘 논 애랑 나랑 누가 더 좋아? 이슬레이가 일부러 심술을 부리며 물었다. 선생님이 제일 좋아. 라이퀴아는 눈도 깜작하지 않고 즉각 대꾸했다. 이슬레이의 손이 덜컥 멈췄다. 라이퀴아는 치켜뜬 눈으로 이슬레이를 한번 바라봤다가 장난스레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형도 좋아. 선생님이랑 형은 특별해. 다 다른 '좋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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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퀴아가 폭우 속을 달리고 있던 것은 꽤 늦은 시간이었다. 수업이 끝나고도 책 한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고 그러도고 십여분을 운동장만 보며 기다린 것이다. 짙게 낀 구름에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해는 기울어질 시간이었고, 잔뜩 물을 머금은 운동화와 빗줄기에 불분명한 시야는 자꾸 라이퀴아의 발목을 잡았다. 별 일이 없다면 이슬레이와 선생님이 라이퀴아의 부재를 알아차리고도 한참이 지났을 시간이었다. 에피타이저의 전화를 받은 선생님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 목소리에 아이를 어떻게 돌보는 거냐고 한바탕 쏟아부으려던 에피타이저가 입을 꾹 다물었다. 흘낏 바라본 라이퀴아는 맹한 얼굴로 와루캥이 사준 레몬차만 홀짝이고 있었다. A건물 사거리에서 동쪽으로 들어오셔서요- 거기 놀이터 맞은 편 편의점이요. 에피타이저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달음박질을 하는 듯 일정하게 바닥을 울리는 소리와, 뭐라 외치는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갑자기 뚝 끊긴 전화에 에피타이저는 휴대전화를 내려놨다. 라이퀴아는 여전히 맹한 얼굴로 사탕을 바스락거리고 있었다.


 "너 이제 큰일났다."

 "?"


 라이퀴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에피타이저를 바라봤다. 부모님 속이나 썩이고. 에피타이저의 말에 라이퀴아는 사탕을 까는데 집중했다. 부모님 아니에요, 선생님이야. 라이퀴아의 대꾸를 마지막으로 두 사람 사이에 말들이 끊겼다. 사탕은 쉽게 까지지 않고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냈다. 그래서 혼자 갈 수 있댔는데- 침묵을 시작한 것도 먼저 깬 것도 라이퀴아였다. 선생님 귀찮게 하기 싫었는데. 에피타이저는 묵묵히 라이퀴아의 말을 들으며 라이퀴아의 손에서 사탕을 가져갔다. 귀찮은 게 문제가 아닐텐데, 에피타이저는 하고 싶은 말을 입 안으로 삼켰다. 넓은 오지랖과 달리 아이를 달래는 데에는 재주가 없었다. 특히 이런 섬세한 사정의 아이는. 에피타이저는 깐 사탕을 제 입안에 넣고 새로운 사탕을 까서 라이퀴아의 입안에 넣었다. 잔뜩 구겨져 있던 라이퀴아의 미간이 단맛에 조금 누그러졌다. 라이퀴아가 입을 우물거릴 때 마다 뺨이 볼록하게 오르내렸다. 너도 복잡한 애구나. 에피타이저가 한숨을 내쉬며 턱을 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얀 차 한대가 편의점 앞에 세워졌다. 그리 넓지도 않은 길에서 얼마나 속도를 냈는지 흙탕물이 편의점 창에 잔뜩 튀었다. 이런 ㅆ... 에피타이저는 한숨처럼 거친소리를 내뱉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남자가 다급하게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비를 잔뜩 맞은 듯 머리카락과 어깨가 젖어 달라붙어 있었다. 선생님. 라이퀴아가 남자에게 달려가 안겼다. 에피타이저는 연신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남자의 등을 떠밀었다. 조수석에 앉은 라이퀴아의 무릎 위로 가방을 올려준다. 사탕들 넣어놨으니까 먹어. 선생님은 자동차 핸들에 머리를 붙이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숨을 쉴 때 마다 젖은 셔츠가 달라붙은 등이 움직이는게 보였다. 선생님은 에피타이저에게 한 번 고개를 숙이고는 시동을 걸었다. 라이퀴아는 피곤해보이는 선생님의 얼굴에 제 옷소매만 만지작거렸다. 가로등을 지나칠 때마다 지친 뺨에 노란 불빛이 스쳐지나갔다.


 선생님의 착신음은 기본 벨소리였다. 익숙한 소리가 두번 울리기 전에 선생님이 전화를 받았다. 응, 이슬레이. 라이퀴아 찾았어. 지금 운전중이라 통화 길게 못할 거 같아. 목욕물 좀 준비해줄래?





 선생님이 문 가까이에 서기도 전에 이슬레이가 문을 열었다. 옷은 여전히 교복 차림이었고, 넥타이만 풀어헤친 채 단추가 두어개 풀려있었다. 라이퀴아의 얼굴을 확인한 이슬레이에 안도감과 약간의 분노가 동시에 스쳐지나갔다. 선생님이 이슬레이의 뺨을 감싸고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라이퀴아 겁먹는다- 이슬레이는 그제서야 겨우 표정을 풀었다. 현관부터 욕실까지 젖은 발자국이 이어졌다. 흠뻑 젖어 잘 벗겨지지 않는 라이퀴아의 옷을 선생님이 대신 끌어당겼다. 세탁기가 일정한 소음을 내며 돌아갔다. 라이퀴아와 선생님이 씻는 동안 이슬레이는 늦은 저녁을 준비했다. 감정을 실은 칼질이 도마에 푹푹 박혔다.


 "선생님, 형 화났어요?"

 "으음- 아마도?"


 선생님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대꾸했다. 그리고 나도. 이어지는 선생님의 말에 라이퀴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 감아. 라이퀴아가 입을 열기 전에 따뜻한 물줄기가 머리로 쏟아졌다. 라이퀴아는 선생님이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줄 때 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선생님은 꼼꼼한 손길로 라이퀴아의 몸을 씻겼다. 화가 난 사람 같지는 않았다. 라이퀴아는 제 몸이 욕조 안으로 떨어질 때 까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라이퀴아의 체격이 작은 편이라고는 해도 두 사람이 들어찬 욕조는 좁았다. 따뜻한 물이 증기를 만들며 흘러넘쳤다. 라이퀴아는 안그래도 작은 몸을 한껏 웅크렸다. 제가 귀찮게 해서요? 쥐어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라이퀴아가 속삭였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리 넓지 않은 욕실에 어린 목소리가 울렸다. 선생님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다 말고 움직임을 멈췄다. 그렇게 생각하니? 드물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선생님이 대꾸했다. 라이퀴아는 말 없이 입술만 우물거렸다.


 선생님이 라이퀴아에게 이리 오라는 듯이 손을 까닥거렸다. 라이퀴아는 쭈뼛거리다 몸을 움직였다. 라이퀴아의 움직임을 따라 파문이 흩어졌다. 다가온 작은 몸을 제 앞에 앉히고 정수리에 턱을 괴었다. 아파요, 라이퀴아가 목을 움츠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이슬레이랑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걱정'이라는 생소한 단어에 라이퀴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의 밝은 녹색 눈동자는 조금 젖어 있었다. 머리카락에서 흘러 뺨을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이 눈물같이 보였다. 죄송해요. 라이퀴아는 자기도 모르게 그 말을 내뱉었다. 선생님의 눈동자는 여전히 가라앉은채, 눈가만 부드럽게 휘었다. 라이퀴아, 우리는 가족이야. 라이퀴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라이퀴아가 자신의 뜻을 이해했는지 말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이해했기를 바라며 작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자 잘 마른 옷이 욕실 앞에 놓여 있었다. 선생님과 라이퀴아는 옷을 입었다. 머리 말리기를 잠시 뒤로 미루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세 명 분의 식기가 각자의 자리에 놓여 있었다. 저녁은 라이퀴아가 좋아하는- 라이퀴아가 이 집에 와서 처음 먹기도 한- 음식이었다. 다만 라이퀴아가 싫어하는 피망이며 버섯 따위가 큼직하게 썰어져있었다. 라이퀴아가 슬그머니 골라낸 건더기를 듬뿍 퍼올리며 선생님이 라이퀴아의 입 앞에 가져다댔다. 형이 네가 좋아하는거 만들어줬네, 라이퀴아는 눈을 질끈 감고 입을 벌렸다. 라이퀴아의 턱이 두어번 움직이고는 멈췄다.


 "스무번씩 씹고 삼켜야지. 또 체한다."


 이슬레이의 말에 라이퀴아가 겨우 입안의 음식물을 씹었다. 스무번에 미치지 못하는 수 만큼 턱을 더 움직이고, 목 울대가 크게 움직이며 삼킨다. 선생님이 활짝 웃고 이슬레이는 괴롭게 일그러진 라이퀴아의 입가에 소시지를 가져다댔다. 라이퀴아는 한결 편하게 그것을 씹어 삼켰다. 식사를 하며 라이퀴아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늘어놓기 시작했다. 가만히 얘기를 듣던 이슬레이가 그릇을 한번 긁었다. 우산 같이 쓰고 올 친구도 없어? 형도 친구 없잖아. 난 떨거지는 있어. 얘들아... 비숍이 비참한 목소리로 아이들의 대화를 막았다.





 식사가 끝나고 설거지는 선생님의 몫이었다. 이슬레이는 늘 그랬듯이 자신이 하겠다며 나섰지만, 선생님은 이슬레이가 움직이기 전에 먼저 고무장갑을 꼈다. 라이퀴아가 이슬레이의 몸을 욕실로 밀어넣었다. 집안일의 양은 최대한 맞추는 것이 그들의 약속이었다. 라이퀴아는 식사가 끝난 그릇들을 설거지통으로 옮기는 것을 도왔다. 내가 애들을 잘못 키우는 걸까, 음울한 혼잣말이 중간중간 설거지를 하는 선생님에게서 튀어나왔다. 라이퀴아는 그 말에 어찌 반응해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애써 선생님의 말을 흘려 들으며 식탁을 닦는 것 까지 끝내자, 식탁 한켠에 놓인 두유병이 눈에 들어왔다. 에피타이저를 처음 만난 날 받은 것이었다. 라이퀴아는 그것을 마시며 거실 소파에 걸터 앉았다. 입안이 달았다. 편의점에서 먹은 레몬차도, 사탕도 달았다. 라이퀴아는 어렴풋이 사람의 호의라는 것을 알아차린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목 안쪽이 간질거렸다. 


 식사가 늦었던 만큼 밤은 일찍 찾아왔다. 흠뻑 젖은 가방은 내일까지 마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에 쓸만한 가방을 찾느라 옷장을 한번 뒤집었다. 라이퀴아에게 새 가방을 꺼내준 후 선생님은 일찌감치 잠에 들었다. 긴장이 풀려서 그래. 금방 색색 숨소리를 내며 잠든 선생님 대신 이슬레이가 말했다. 문단속을 하고 이슬레이는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라이퀴아는 거실에서 잠시 TV를 보다가 볼만한 채널이 없자 전원을 끄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슬레이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형도 나 걱정했어?"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침대에 앉으며 물었다. 이슬레이는 의자를 돌려 라이퀴아를 바라봤다. 그래. 이슬레이의 대답에 라이퀴아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구나아- 라이퀴아가 그대로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매트리스의 스프링이 가볍게 삐걱이는 소리를 냈다. 좋다, 그런 거. 라이퀴아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만족감이 몸 안 가득 퍼졌다. 라이퀴아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를 억지로 깨우지 않고 다시 책상 쪽으로 몸을 돌렸다. 사각거리며 펜이 종이 위를 지나는 소리만 라이퀴아에게 자장가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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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구성원이 두명에서 세명으로 바뀌고, 제각각 생활에 적응하고 있었다. 이슬레이의 방에는 이층침대가 생겼고, 라이퀴아가 2층을 차지했다. 책상까지 꽉꽉 들어찬 방 안에 더 가구를 추가할 공간이 없었기에 옷을 담는 수납장은 선생님의 침실에, 책과 접이식 책상은 선생님의 서재에. 라이퀴아의 생활반경은 집안 곳곳에 흩어졌다.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은 거실이었다. 그 다음은 서재. 라이퀴아는 특별하게 외로움을 타는 아이는 아니었다. 홀로 집을 지킬 때면 혼자 게임하거나, 책을 읽으며 잘만 지냈다. 친구라도 생겨 놀다 들어오면 좋으련만 선생님이 슬그머니 얘기를 꺼내면 라이퀴아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선생님과 이슬레이는 단 둘이 살았을 때 그리 집에 오래 붙어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슬레이는 자기관리에 집중하는 편이었고 선생님은 일이 바쁜 사람이었다. 이슬레이가 더 어렸을 때는 최대한 이슬레이와 생활 시간을 맞췄지만, 이슬레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부터는 이슬레이가 먼저 학교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탓에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물론 그것은 두 사람이 살 때 이야기였다. 라이퀴아는 아직 초등학생이었고, 학교를 끝마치고도 두 세시간은 홀로 있어야 했다. 사고를 치거나 위험한 행동을 하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혼자 둬도 마냥 괜찮을 나이도 아니었다. 둘의 생각은 비슷했는지 한동안 빠른 귀가를 했다. 라이퀴아가 그것을 눈치채고 저 애 아니거든요, 하고 말렸지만 둘에게 라이퀴아는 애였다. 선생님과 이슬레이의 마음이야 어찌됐든, 가족 구성원이 바뀌었다고 일의 양이 줄어들거나 해야할 공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선생님은 때로는 출장을 나가기도 했고, 이슬레이도 공부가 잘 풀리지 않은 날은 학교에서 자습을 하고 돌아왔다. 가끔 선생님과 이슬레이가 모두 늦고 라이퀴아도 열쇠를 깜박 두고 나오는 운이 나쁜 날이면 라이퀴아는 동네에 있는 놀이터에서 시간을 때웠다. 집에서 대로변 방향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곳이었다. 이슬레이와 선생님이 항상 지나치는 길목이기도 했다.


 라이퀴아는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편이 아니었다. 놀이터 한켠에 마련된 정자에 앉아 책을 읽었다. 유난히 싹싹한 아이들이 종종 라이퀴아 쪽을 바라봤지만 라이퀴아는 책에 집중한 척을 하며 고개도 들지 않았다. 책을 읽기 힘들 정도로 어두워지면 아이들은 하나 둘 줄어들었고, 라이퀴아는 혼자 남고 나서야 책을 가방 안에 넣었다. 해가 진 후에는 제법 쌀쌀했다. 라이퀴아는 무릎을 당겨 안으며 힐끗 길가를 바라봤다. 놀이터 맞은 편 편의점 간판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빨간색 머리카락에 유니폼을 걸친 사람이 마찬가지로 라이퀴아 쪽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눈꼬리가 위로 쭉 뻗어있고, 미간은 한껏 찌푸린 상태였다. 무서운 표정에 라이퀴아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그 사람은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는가 싶더니 금방 다시 나왔다. 라이퀴아는 조금 긴장한 상태로 그 사람을 바라봤다. 그 사람은 유니폼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라이퀴아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온다. 기분 탓이겠지, 난 잘못한거 없는 걸. 오지마-


 "거기서 뭐 하는 거야."


 라이퀴아의 바람과 달리 그 사람은 라이퀴아에게 말을 걸었다. 표정처럼, 상냥함과는 거리가 먼 말투에 라이퀴아는 잠시 그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그 사람은 라이퀴아의 어깨가 한껏 움츠러든 것과 눈치를 살피는 듯 한 표정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고 제 미간을 꾹꾹 눌러 인상을 폈다. 얼굴과 달리 공격적이지 않은 태도에 라이퀴아의 어깨가 조금 풀어졌다. 라이퀴아는 그제서야 그 사람의 모습을 천천히 살폈다. 나이는 이슬레이와 비슷할까, 노을 탓에 빨간 곱슬머리가 타오르는 것 처럼 보였다. 노랗게 빛나는 이름표에는 편의점 로고 옆으로 에피타이저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조금 복잡한 시선이 라이퀴아를 내려다본다. 그 사람은 주머니에 넣어둔 것을 던지듯이 라이퀴아에게 줬다. 따뜻한 온기가 손에서부터 퍼져나갔다. 라이퀴아는 멍청한 표정으로 눈만 깜박이며 손 안으로 떨어진 두유를 바라봤다. 춥다, 들어가라. 라이퀴아가 인사를 하기도 전에 유니폼을 입은 몸이 돌아섰다. 손님 한명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주는거 먹으면 안된댔는데. 라이퀴아는 고민하며 손 안에 든 병을 주물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슬레이가 놀이터 앞을 지나갔고,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받은 두유는 결국 마시지 않았다. 버리는 것도 내키지 않았기에 라이퀴아는 그것을 식탁 위에 올려뒀다.





 라이퀴아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마중을 나올 사람도 같이 우산을 쓰고 갈 친구도 없었다. 라이퀴아는 중앙현관 계단에서 책을 펼쳤다. 적당히 비가 그치면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책은 다 읽었고, 슬슬 배가 고팠다. 선생님이든 이슬레이든 집에 돌아올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늦으면 걱정할텐데. 라이퀴아는 책가방을 앞으로 메고 달리기 시작했다. 몸을 때리듯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달리는 것은 꽤나 지치는 일이었다. 라이퀴아는 중간중간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에서 숨을 돌리고 다시 달리기를 반복했다. 라이퀴아는 놀이터 맞은편 편의점에서도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라이퀴아는 차일 아래에서 가게 안을 힐끔 들여다봤다. 카운터에는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라이퀴아는 머리를 털어내고 티셔츠를 쥐어짰다. 추위로 이가 딱딱 부딪쳤다.


 "역시, 그 때 걔네."

 "...에피타이저."


 라이퀴아 앞으로 얼굴이 불쑥 들이밀어졌다. 빨간 머리카락에 올라간 눈매. 겨우 두번째일 뿐이지만 기억에 남은 얼굴에 라이퀴아가 반사적으로 이름을 불렀다. 에피타이저의 눈썹이 비뚤게 올라갔다. 방금 전까지 카운터에 서 있던 사람은 유니폼 조끼의 지퍼를 내리고 있었다. 에피타이저가 그 사람에게 손가락 다섯개를 펴 보였고 그 사람은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지퍼를 다시 올렸다. 땡큐, 5분이면 되니까- 에피타이저가 소리를 지르며 건물에 딸린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카운터에 서 있던 사람이 사람좋게 웃으며 라이퀴아에게 손짓했다. 라이퀴아는 경계심이 가득한 얼굴로 가방만 끌어안았다. 에피타이저는 자신이 제시한 5분이 지나기 전에 다시 편의점으로 돌아왔다. 젖은 라이퀴아의 어깨를 거리낌 없이 끌어당기며 편의점 안으로 밀어넣는다. 뭐 이렇게 겁이 많아. 에피타이저가 라이퀴아의 머리 위에 수건을 올렸다. 섬유유연제의 달큰한 향기가 났다.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똑똑한거지. 카운터에 서 있던 사람이 라이퀴아 대신 대꾸했다.


 카운터 안 플라스틱 의자에 라이퀴아는 우두커니 앉았다. 커다란 타올이 담요처럼 라이퀴아의 몸을 감싸고 있었고 에피타이저의 거친 손놀림으로 머리카락은 얼추 말라있었다. 카운터에 서 있던- 에피타이저가 와루캥이라고 부른 사람은 라이퀴아가 지난 자리마다 생긴 물자국을 대걸레로 닦았다.


 "너 가출했냐"


 에피타이저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에피타이저는 라이퀴아가 놀이터에서 뛰어 노는 것도 아니면서 해가 질때까지 놀이터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종종 봤다. 이렇게나 비가 쏟아지는 날 학교가 끝나고도 한참이 지난 시간에 거리를 달리고 있는것도 목격했고, 라이퀴아의 가방 안에 들어있던- 혹시라도 젖었을까봐 말리려고 꺼내둔- 노트에는 5학년 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라이퀴아는 그보다 훨씬 어리고 마르게 보였다. 설마 할 것들도 여러개 모이니 의혹은 깊어졌다. 가출이라는 단어에 라이퀴아는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에피타이저로서는 마냥 믿을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부모님 번호 불러"

 "혼자 갈 수 있는데...요."

 "그러면 파출소나 청소년쉼터로 연락하는 거고."


 라이퀴아는 선생님을 귀찮게 만들까 싶어 고집을 부렸다. 선생님이 이런 것을 귀찮게 여기지 않는 사람인 것과는 별개로 라이퀴아가 신경을 쓰는 지점이 있었다. 에피타이저가 휴대전화를 꺼내 뭔가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010- 라이퀴아가 다급하게 선생님의 연락처를 말했다. 와루캥은 대걸레질을 마치고 나서야 유니폼을 벗었다. 에피타이저와 라이퀴아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고, 직접 바코드를 들어 사탕 몇개와 온음료를 결제한다. 먹으면서 해. 난 간다. 와루캥이 처음으로 두 사람의 말 사이에 끼어들었다. 산 것들을 두 사람 방향을 쭉 밀어준다. 에피타이저는 라이퀴아가 부른 연락처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아, 이걸 왜 오빠가 사요. 에피타이저가 전화의 마이크 부분을 손으로 막으며 와루캥에게 말했다. 타이밍 좋게 통화연결음이 끝나고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와루캥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편의점을 빠져나갔다. 사람 좋은 얼굴이 라이퀴아에게 손을 흔들었다. 라이퀴아는 조금 쭈뼛거리다 그 손짓에 마주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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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험생의 공부 핑계와 어린 아이의 거북한 표정도 통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다 같이 장을 보러가자는 말에 이슬레이와 라이퀴아는 싫은 기색을 내비쳤으나- 선생님의 시무룩한 표정에 입술을 꾹 깨물고 옷을 갈아입을 뿐이었다. 라이퀴아는 먼저 옷을 갈아입고 나와 선생님의 손을 잡았다. 살갑게 제게 다가오는 라이퀴아의 모습에 선생님은 부드럽게 웃었다. 조심스럽게 손가락 끝만 닿은 손을 잡아당겼다. 작고 마른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고, 선생님은 라이퀴아의 엉덩이를 받쳐 안았다. 라이퀴아는 제 손을 어디에 둘지 모르고 허둥대다 겨우 선생님의 어깨를 잡았다. 따라 나온 이슬레이가 뒤로 쏠린 라이퀴아의 등을 밀었다. 그제서야 라이퀴아는 비교적 자연스러운 자세로 선생님의 상체에 몸을 기댔다. 이슬레이는 마지막으로 문단속을 하고 조금 앞서 걸었다.


 "안고 내려가시게요?"

 "주차장까지만~"


 라이퀴아는 민망한 듯 귓바퀴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주 잠깐 바둥거리긴 했지만 선생님이 엄살을 부리며 아파하자 잔뜩 겁먹은 토끼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이슬레이가 뒷좌석의 문을 열자 그제서야 선생님은 라이퀴아를 내려놨다. 라이퀴아는 달아나듯 차에 올라탔다. 조수석에는 잡동사니가 쌓여있었고,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옆에 앉았다. 이슬레이가 라이퀴아의 안전벨트를 매 주기 위해 다가가자 라이퀴아가 움찔 놀라며 몸을 좌석에 딱 붙였다. 뭘 자꾸 놀라, 능청스러운 이슬레이의 태도에 라이퀴아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슬레이가 상냥했다. 선생님은 이슬레이에게 라이퀴아를 맡기고는 주차할 공간을 찾아 다시 차를 몰았다. 1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합류하기로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들은 먼저 차에서 내렸다. 이슬레이는 차 문을 잡아주고, 라이퀴아를 차도 반대쪽에 걷게 했으며, 턱이 있는 곳마다 나긋한 목소리로 조심하라 말했고, 꽤 다정한 태도로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런 태도와 반대로 라이퀴아는 점점 표정이 일그러졌다. 반듯하게 생긴 얼굴이 라이퀴아를 내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휠 때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주말이라 그런지 대형마트의 안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나란히 손을 잡고 서 있는 이슬레이와 라이퀴아를 몇몇 사람들이 돌아봤다. 대부분은 이슬레이의 얼굴을 향했고, 라이퀴아는 그것을 이해했다. 다만 머리로 이해한 것과 달리- 라이퀴아에게 그린 듯 한 이슬레이의 미소는 단단히 자신을 체하게 만든 저녁식사를 떠올리게 만들 뿐이었다. 이슬레이에게 잡혀있을 뿐인 손에 힘이 들어갔다. 라이퀴아가 이슬레이의 손을 두어번 잡아 당기자, 이슬레이는 무릎을 반쯤 굽혀 라이퀴아에게 머리를 기울였다. 형이 상냥하네, 넉살 좋은 어르신이 지나가며 웃었고 라이퀴아는 어색하게- 이슬레이는 풋풋하게 웃었다.


 대체 왜 그래요? 라이퀴아는 안 그래도 작은 목소리를 한껏 낮춰 속삭였다. 이슬레이는 그런 라이퀴아를 지긋이 바라보다니 핫, 하고 터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이슬레이의 눈썹이 위로 올라가며 가늘게 선이 생겼다. 상냥함과는 거리가 먼 표정이었지만 라이퀴아는 그 표정을 보는 것이 훨씬 편했다. 라이퀴아가 한 행동을 흉내내 이슬레이가 라이퀴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래야 내가 더 착하게 보일거 아냐. 라이퀴아는 입을 다물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이슬레이를 바라봤다. 딱 벌어진 입을 이슬레이가 닫아줬다.


 "선생님은 남들 입에 오르내리기 쉬운 사람이거든."


 내가 이야기를 보탤 필요는 없지.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말을 모두 이해한 것은 아니었만, '선생님'이라는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슬레이의 작은 움직임에도 움찔움찔 놀라던 라이퀴아가 먼저 이슬레이의 손을 잡았다. 이슬레이는 연신 입꼬리를 끌어 올리던 것을 멈추고, 작은 손을 맞잡았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없이 선생님이 오기를 기다렸다. 선생님이 쇼핑카트를 끌고 나타나자 라이퀴아는 바로 선생님에게 달려갔다. 이슬레이의 손은 여전히 라이퀴아에게 꽉 잡힌 상태여서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상체가 기울었다. 놓지 않는구나. 넘어질 뻔 했는데도 드는 생각은 그것 뿐이었다.


 단지 한 사람이 늘었을 뿐이지만 살 물건은 제법 많았다. 욕실 용품과 새로운 식기, 딛고 오르내릴 등받이가 없는 작은 의자. 카트가 점점 라이퀴아를 위한 물품들로 채워졌다. 점점 흥분한 선생님이 침대를 들여놓을까, 방이 하나 더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갈까- 하는 말을 꺼냈을 때, 라이퀴아는 선생님이 산 물건들을 하나하나 선반으로 다시 돌려놨다. 최소한으로 필요한 물품만 남겨두고도 라이퀴아는 불편한 표정이었다. 선생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고, 이슬레이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장난감 코너에서는 라이퀴아가 가지고 싶은게없다고 하자 종류별로 모조리 쓸어담으려는 선생님을 이슬레이가 제지했다. 라이퀴아는 먼저 바삐 발을 놀려 장난감 코너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적어도 옷은 사자."


 선생님은 라이퀴아를 뒤에서 낚아채 듯 안아올렸다. 발 끝이 들린 라이퀴아가 고개만 돌려 선생님을 올려다봤다. 응? 제발- 선생님이 재차 라이퀴아의 대답을 재촉하자 그제서야 라이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퀴아는 아동복 코너에서 오래 살피는 것도 없이 가장 가까이에 있던 옷을 집어들었다. 가장 저렴한 가격표가 붙은 바지는 선명한 민트색이었고, 이슬레이는 난폭하게 그것을 뺏어 제자리로 돌려놨다. 그건 아니지. 그나마 제 편을 들어주던 이슬레이가 가차없이 말했다. 몇 번의 갈아입히기 끝에 결국 대부분의 옷을 결정한 것은 이슬레이였고, 라이퀴아가 가격표를 확인하기도 전에 선생님은 카트 안쪽으로 옷을 밀어넣었다. 라이퀴아가 가격을 확인할 수 있었던 건 가장 마지막에 직접 고른 토끼무늬 잠옷 뿐이었다. 배신자. 라이퀴아가 소리없이 입만 벙긋거리며 이슬레이를 비난했다. 이슬레이는 입꼬리를 비틀어올리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세 사람이 집에 도착한 것은 저녁 식사시간이 다 되어갈 쯤이었다. 마트를 나오고도 수납장과 접이식 책상, 침대 등을 보기 위해 가구점을 몇군데나 들락거린 탓이었다. 선생님과 이슬레이는 양 손도 모자라 팔과 몸 사이에 끼워야 할 정도로 짐을 한가득 들고 있었고, 라이퀴아가 허둥지둥 집 문을 열었다. 식재료가 담긴 봉지만 바로 부엌을 향했고, 나머지는 거실에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선생님은 줄 끊어진 인형처럼 소파 위로 늘어졌다. 이슬레이도 잠시 벽을 짚고 서서 자신의 어깨를 두드렸다. 냉장고는 새로운 식재료들로 가득 찼지만, 저녁은 배달 음식이었다. 이슬레이는 수납장의 조립설명서를 들여다봤다.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은데- 귀찮은 일을 빨리 해치워버리고 싶은 생각과 피로감을 저울질한다. 이슬레이가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선생님이 거실에 앉아 상자를 뜯기 시작했다. 이슬레이는 자동으로 선생님의 옆에 앉았다. 라이퀴아도 둘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작은 크기의 수납장은 만드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부품을 맞춰 나사를 조이는 것 보다 흔들리지 않게 바짝 끼우는 것이 더 힘들었다. 대강의 모양이 잡히고 타이밍 좋게 벨이 울렸다. 선생님이 음식을 받으러 가고, 이슬레이는 그동안 거실을 치웠다. 부품들을 감싸고 있던 스티로폴과 박스를 분류해 쌓아둔다. 오늘은 뭘 버리는 날이더라, 기억을 더듬고 있자 라이퀴아가 이슬레이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형, 선생님이 밥먹고 같이 치우재."


 라이퀴아가 처음으로 이슬레이를 불렀다. 알게 된 지 겨우 이틀째지만 라이퀴아는 이슬레이를 단 한번도 부른 적이 없었다. 할 말이 있을때면 돌아볼 때 까지 가만히 바라보거나, 저기- 하고 흐린 감탄사로 부를 뿐이었다. 어물어물 말 끝을 흐리는 듯한 존대도 아니었다. 끝이 처진 눈매가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이슬레이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슬레이는 얼떨떨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이 우스워 라이퀴아는 푸스스 바람이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순진하게 풀어진 뺨에 생기가 돌았다. 얘들아, 주방에서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라이퀴아는 먼저 등을 돌려 주방을 향했다. 빨리와, 형. 이슬레이는 어쩐지 그 목소리가, 그 웃음이 귓가를 계속 맴도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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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퀴아가 잠든 후에도 선생님은 한참동안이나 잠들지 못했다. 제 몸에 기대 자는 작은 아이가 혹여 불편할까- 아픔을 참지는 않을까- 불안해했다. 이슬레이가 어린 시절 열에 앓다 눈을 떴을 때면 꼭 보이던 그 얼굴이었다. 이슬레이에게는 들어가서 자라는 말을 하면서 본인은 연신 라이퀴아의 가슴을 토닥이고 있었다. 선생님의 눈은 반쯤 감겨있었다. 걱정에 억지로 졸음을 몰아내다가도 푹 고개가 꺾이고, 그것에 놀라 깨고 다시 고개가 꺾이기를 반복한다. 이슬레이는 그런 선생님을 보고 방에 들어가기는 커녕 이불을 들고 나왔다. 이불을 아이의 몸 위로 덮어주자 선생님이 부드럽게 웃었다.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착하네, 라는 한마디를 겨우 하고는 스르르 몸이 기울어진다. 선생님은 잠이 많은 편이었다. 한번 잠들면 쉽게 깨지 않는 편이기도 했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에게 덮어줬던 이불 한 귀퉁이를 끌어 선생님의 몸 위까지 덮었다.


 또 혼자 깨면 곤란하니까, 이슬레이는 아무도 듣지 않을 핑계를 중얼거리고는 잠든 라이퀴아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공연히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어 라이퀴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라이퀴아의 얼굴 근육이 움찔거리는 것에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라이퀴아가 부드럽게 풀어진 얼굴로 웃으며 이슬레이의 손에 머리를 부볐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머리를 헝크러트리듯 한번 매만지고는 손을 떼어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잠들 수 없었다. 열이 나는 걸까, 라이퀴아에게 닿았던 손이 홧홧했다. 열이 오른 손을 쥐었다피며 이슬레이는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선생님과 라이퀴아는 맞춘듯이 일정한 박자로 호흡했고, 이슬레이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가장 먼저 아침을 맞이한 것은 라이퀴아였다. 잘 뜨이지 않는 눈을 문질러가며 몸을 일으킨다. 거실 바닥에 헤어 드라이어는 콘센트만 뽑힌 채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고, 젖은 수건은 소파에 대충 걸쳐 있었다. 선생님은 라이퀴아의 옆에 모로 누워 있었고, 이슬레이는 소파에 머리를 기대앉은 자세였다. 이슬레이는 이불도 없이 자고 있었고, 라이퀴아와 선생님이 함께 이불 하나를 나눠 쓰고 있었다. 주변을 보아하니 라이퀴아기 지난 밤 까무룩 잠든 이후 모두 거실에서 잠든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7시 24분. 라이퀴아는 멍한 머리로 오늘이 주말인 것을 기억해냈다. 선생님은 주말을 가리지 않고 바쁜 편이었지만- 라이퀴아는 선생님을 깨워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했다. 라이퀴아는 잠든 선생님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감긴 눈꺼풀이 움찔 떨리고, 눈이 마주쳤다. 선생님은 라이퀴아의 얼굴을 한번 확인하더니 그대로 라이퀴아의 몸을 감싸 끌어안았다. 더 자렴, 선생님은 다시 눈을 감고 속삭였다. 목소리에서는 졸음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라이퀴아는 눈치를 보다 선생님 쪽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라이퀴아의 등을 완전히 감싸안은 팔이 도닥도닥 기분 좋은 리듬을 만들었다. 졸리지 않다, 는 생각과 달리 따뜻한 체온과 도닥거림에 하품이 튀어나왔다.


 라이퀴아는 자신이 잠드는 것도 모르고 다시 잠에 빠졌다. 새벽 내내 난리를 쳤으니, 활동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색색 숨을 고르는 소리만 거실에 가득했다. 비스듬하게 떠오른 해가 창문을 통과하며 길게 볕의 길을 만들었다. 햇빛이 발치를 간지르고, 창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누워있던 선생님이 눈을 떴다. 선생님은 제 품 안에서 색색 숨을 고르는 라이퀴아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라이퀴아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팔을 빼내고 일어나, 불편해보이는 자세로 자고 있는 이슬레이의 어깨를 흔들었다. 지난 새벽, 라이퀴아를 재운 이후의 기억이 없는 것을 보니- 이불은 이슬레이가 꺼낸 것이 분명했다. 이슬레이의 미간이 좁아지고 가느다란 주름이 잡혔다. 누워서 자야지, 선생님의 말에 잠이 덜 깬 이슬레이는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미끄러지듯 몸을 움직였다. 선생님은 이불을 잘 정리해 아이들을 덮었다.


 "역시 닮았다니까..."


 이슬레이와 라이퀴아는 곡옥처럼 몸을 웅크리고, 등을 마주 대하고 있었다. 사이 좋게 얼굴이라도 마주보고 자면 좋을텐데. 고분고분한 듯 하면서도 자기 주장이 뚜렷한 점 까지 닮은걸까. 그 모습이 아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 웃음이 새었다. 흐뭇한 얼굴로 선생님이 아이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아이들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이슬레이도 라이퀴아도 날 너무 좋아한다니까. 아, 하고 뭔가 생각난 듯 선생님이 방으로 들어가 핸드폰을 가져왔다. 등을 맞댄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홈화면으로 등록한다. 둘이 안다면 불만스러워 하겠지만 억지로 사진을 지우지도 않을 것이다. 선생님에게도 둘은 유난히 아픈 손가락이었다. 일단 좀 더 자게 둘까, 성장기의 아이들은 충분히 자야지.


 칫솔에 치약을 눌러짠다. 느긋한 움직임으로 칫솔을 입에 물고 아직 열려있는 환기창을 닫았다. 선생님은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을 치약의 맛이 신경쓰였다. 어린이용 치약이 필요할까, 5학년이면 필요 없나. 하지만 라이퀴아 매운거 싫어하기도 하고- 선생님의 최초의 육아는 중학생 이슬레이와 함께 였다. 초등학생과 중학생. 시기적으로는 비슷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전적으로 어른의 기준이었다. 이슬레이도 해가 다르게 성장했고, 심지어 꽤나 어른인 척 하는 아이에 속했다. 그러고보니 그런 점도 닮았네. 선생님은 칫솔질을 하던 손을 멈추고 큭큭 웃었다. 이슬레이는 키도 빨리 자란 편이었지만, 라이퀴아는 또래보다 두어살은 어리게 보일 정도로 작았다. 세면대는 쓰기 불편하지 않으려나. 수납장은 너무 높지 않을까. 옷도 사야겠지. 잠옷은 귀여운 걸로 사줘야겠다. 이슬레이 만큼이나 빨리 자라려나. 오래 어리광 부려도 좋을텐데.





 이슬레이와 라이퀴아가 깬 것은 선생님이 씻고 나와 부엌을 뒤질 때 였다. 선생님의 계획으로는 아이들을 더 재우고, 아침 겸 점심을 준비한 후 느즈막하게 깨울 생각이었지만- 성실하기 짝이 없는 아이들은 그 전에 깨버렸다. 이슬레이는 일어나자마자 씻으러 들어갔다. 밥으로 뭐가 좋은지 고민하느라 냉장고를 열중해 뒤지고 있던 선생님은 물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누군가 깬 것을 알아차렸다. 라이퀴아는 뭉그적거리는 움직임으로 제 옆을 몇번 짚었다. 손에 아무것도 닿는게 없자 라이퀴아의 인상이 한껏 찌푸린 채 주변을 둘러봤다. 멍한 머리로 선생님도, 그리고 또 다른 동거인도 없는 것을 알아차린 라이퀴아는 놀란 토끼눈을 하며 허둥지둥 일어났다. 부엌과 거실이 이어진 구조의 집이었기에 라이퀴아는 금방 선생님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선생님의 얼굴을 확인한 것 만으로도 아이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가느다란 발목에 긴 바지가 자꾸 채여 불편할만도 했건만, 라이퀴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선생님에게 다가갔다. 기어코 발 아래까지 흘러내린 옷자락을 밟고 몸이 기울었다.


 "아침 인사야?"


 폭, 제 품안에 안긴 라이퀴아를 보며 선생님이 물었다. 라이퀴아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두 팔이 그대로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라이퀴아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라이퀴아는 선생님을 올려다봤다. 선생님 기뻐보여. 라이퀴아는 선생님을 따라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라이퀴아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발 끝이 살짝 뜰 정도로 강하게 안긴 라이퀴아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뭐하세요?"


 둥실둥실 들뜬 두 사람을 본 이슬레이가 물었다. 이슬레이는 일어난지 얼마 안 된 사람 답지 않았다. 미형의 얼굴은 약간 피곤한 기색이 돌았지만 여전히 말끔했고, 물기가 살짝 남아있는 머리카락은 눌린 자국 없이 단정했다. 이슬레이도 할래? 선생님이 한 팔로는 여전히 라이퀴아를 끌어안은 채 다른 한 팔을 벌렸다. 선생님에게는 방긋방긋 잘도 웃던 라이퀴아가 경계하는 얼굴로 이슬레이를 바라봤다. 이슬레이가 거절하자, 안도한 얼굴이 한숨을 내쉰다. 너무 노골적인데. 아직 숨길 줄을 모르는 건가. 이슬레이의 거절에 선생님은 크게 신경쓰지도 않고 그대로 다시 라이퀴아를 안았다. 오히려 거절한 이슬레이만 찝찝해진 채 입을 삐죽였다. 씻고 와. 선생님의 말에 라이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에게 아침 인사도 하지 않고 욕실로 들어가버렸다.


 라이퀴아가 씻으러 들어간 동안 이슬레이는 거실을 치웠다. 헤어 드라이어의 선을 꼼꼼하게 감고, 이불을 개켜 방에 가져다두고, 소파 위를 뒹구는 수건을 거둬 세탁물함에 가져다 놓는다. 딱히 힘들 일은 없었지만 밤 동안 소파에 머리를 괴고 잔 탓인지 특정 각도로 움직일때면 목이 뻣뻣하게 당기며 아팠다. 목덜미를 누르며 머리를 좌우로 움직인다. 욕실에서 나온 라이퀴아가 의아한 얼굴로 이슬레이를 바라봤고, 이슬레이는 시치미를 떼며 몸을 곧게 폈다. 아침 겸 점심이 된 식사는 크루통이 올라간 인스턴트 스프였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에게 가식적인 미소를 보이지도, 더 먹겠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라이퀴아는 딱 제가 먹을 만큼을 천천히 먹었다. 선생님은 이슬레이와 라이퀴아의 모습을 곁눈질로 확인하고는 스푼을 들었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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