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퀴아가 비에 흠뻑 젖어 귀가한 후 이틀이 지난 주말이었다. 고소한 빵 굽는 냄새에 라이퀴아는 눈을 떴다. 잘 뜨이지 않는 눈을 비비며 침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간다. 이슬레이는 이미 활동을 시작했는지 아래층 침대는 이불이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방 밖에서 일정하게 말소리가 들리는 것이 선생님도 깨어있는 듯 했다. 라이퀴아의 예상대로 두 사람은 부엌에 있었다. 이슬레이는 식탁 앞에 앉아 빵을 씹고 있었고, 선생님은 토스트기의 타이머를 돌리던 참이었다. 저녁 전에는 들어올게요. 그래, 바래다줄까? 아뇨, 오늘 인사 가신다면서요-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목소리들이 라이퀴아의 등장에 끊겼다. 선생님이 먼저 라이퀴아를 알아차리고 시선을 돌리자 이슬레이의 얼굴도 따라 움직였다.


 "라이퀴아, 잘잤어?"

 "어제 늦게 자더니, 일찍 일어났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라이퀴아는 인사에 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이슬레이는 늘 그랬듯이 이른 아침 같지 않은- 말끔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버터, 사과잼. 이슬레이의 말에 라이퀴아가 손가락으로 사과잼 병을 가리켰다. 이슬레이는 먹던 빵을 입에 문 채 토스트에 사과잼을 바르기 시작했다. 사과 알갱이가 노랗게 반들거리는 것이 먹음직스러웠다. 라이퀴아는 그 빵이 접시에 담겨 제 앞에 내밀어질 때 까지 이슬레이의 식사를 신기한 듯 바라봤다. 어떻게 안 흘리지. 라이퀴아가 최대한 이슬레이의 흉내를 내며 조심스럽게 빵을 한 입 베어물었다. 하얀 접시 위에 노릇한 부스러기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우유를 주러 다가온 선생님이 라이퀴아의 입가를 닦아줬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가 빵을 반 쯤 먹어치웠을 때 먼저 일어났다. 라이퀴아가 다급하게 빵을 씹어 삼키고 조금 멘 목소리로 인사했다. 다녀오세요.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머리를 한번 헤집듯이 쓰다듬고는 집을 나섰다. 선생님은 라이퀴아가 식사를 하는 동안 앞치마를 벗고 차를 마셨다. 라이퀴아는 차의 향이 선생님과 꽤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평소 주말과 달리 잘 차려입고 있었다. 오늘도 나가세요? 라이퀴아가 조금 쓸쓸한 얼굴로 컵을 만지작거렸다. 너도 가야지. 선생님이 찻잔을 들어올린 채 말했다. 아침식사의 설거지는 조금 미룬 채 두 사람은 나갈 채비를 했다. 선생님은 손에 종이가방 두개를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 라이퀴아의 손을 잡았다.


 밖은 몇일 전의 폭우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좋은 날씨였다. 편의점은 아침이라고 특별히 더 분주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새벽부터 아침 타임을 맡은 에피타이저의 얼굴에는 피곤이 가득했다. 종이 울리는 소리에 에피타이저는 반사적으로 인사를 했다. 에피타아저는 선생님의 얼굴을 보고 긴가민가한 표정을 하더니 그 옆에 매달린 라이퀴아를 보고 아는 체를 했다. 라이퀴아는 쭈뼛거리는 움직임으로 에피타이저에게 다가섰다. 에피타이저는 피곤한 기색을 최대한 숨기고 상체를 숙여 시선을 맞췄다. 굉장한 말이라도 하는 것 처럼 라이퀴아는 긴장하고 있었다.


 "두유 맛있었어요."

 "푸핫"


 에피타이저가 웃음을 터트렸다. 선생님은 몇번이고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했고 에피타이저는 손사랫질을 했다. 이럴 때만 손님이 없지, 에피타이저는 불만의 말을 겨우 삼키며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가벼운 인사가 오갔다. 애가 단걸 잘먹던데요. 에피타이저는 별 의미 없이 말했지만 선생님의 웃음이 잠시 멈췄다. 그런 내색 한 적 없는데- 선생님은 제 굳은 뺨을 문질렀다. 라이퀴아는 쓸데없이 생각이 많고, 좀처럼 좋고 싫음을 표현하지 않는 아이였다. 에피타이저는 선생님의 표정에 자신의 말 중 실수가 있었나 되짚어 봤지만 짐작이 가는 것은 없었다. 물론 에피타이저의 잘못은 없었다.


 "얘한테 과자 사 준 오빠는 오늘 안와요."


 에피타이저는 능숙하게 대화의 공백을 모르는 척, 화제를 돌렸다. 선생님의 옷자락을 붙잡은 채 얌전히 어른들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라이퀴아가 반응을 보였다. 라이퀴아는 에피타이저의 얼굴을 한번 바라봤다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내렸다. 선생님이 움츠러든 라이퀴아의 어깨를 도닥였다. 에피타이저는 그런 라이퀴아를 보더니 펜과 남는 영수증 하나를 잡더니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한번 여기로 가보세요. 에피타이저가 그린 것은 편의점과 놀이터를 중심으로 한 주변 약도였다. 놀이터의 뒷 편, 얼마 멀지 않은 위치에 별표가 그려졌다. 스피어 나이츠 공방. 동네 사람이라면 오며가며 한번쯤 본 것 같은 기억이 있는 이름이었다. 공방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유능하고 촉망받는 인재인지 여부는 둘째치고- 아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유명하기도 했다. 주택가 한가운데, 탁 트인 낮은 담이라는 조건 덕분에 어른들도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오빠 여기서 지내거든요. 에피타이저가 선생님에게 약도를 건내며 말했다. B초등학교에서 방과후지도하는 사람도 있고, 애들도 많고. 선생님은 에피타이저의 설명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약도를 바라봤다. 사양하는 에피타이저에게 선생님은 끈질기게 종이가방을 건냈다. 그 형 한테도 과자 맛있었다고 말해. 편의점을 나서는 라이퀴아에게 에피타이저가 손을 흔들며 외쳤다.


 스피어 나이츠 공방은 그리 멀지 않았다. 낮은 담에 대문이랄 것이 없이 탁 트여 있었다. 덩치가 큰 남자의 목마를 타고 있던 아이가 먼저 선생님과 라이퀴아를 알아차렸다. 하늘색 머리의 아이는 다리를 까닥거리더니 몸을 앞으로 확 숙였다. 떨어질 것처럼 기울어진 몸을 남자는 능숙하게 받았다. 손님! 알았어- 위험하니까 너무 숙이지 마. 남자는 아이를 제 어깨에서 내리며 말을 덧붙였다. 아이는 제 또래처럼 보이는 라이퀴아를 물끄러미 보더니 건물 안으로 달려가 버렸다. 엑스트라, 인사! 남자가 외쳤지만 돌아보는 기색도 없었다. 남자와 선생님은 어색하게 서로 고개를 숙였다.


 "전에 우리 아이가 신세를 졌다고 들었습니다."

 "네? 아, 아아. 일단 들어오세요."


 남자, 와루캥은 라이퀴아에게 살갑게 웃으며 말했다. 라이퀴아는 와루캥이 손을 흔들어주고 나서야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와루캥은 두 사람을 건물 안으로 안내했다. 건물 안으로 사라졌던 엑스트라는 분홍색 곱슬머리를 한 여자아이와 노란 머리의 남자아이를 데리고 문가에서 라이퀴아를 훔쳐보고 있었다. 쟤 걔 아냐? 놀이터에서 책 읽는- 메리메리가 말 걸고 싶어서 안달났던 애. 이름으로 막 부르지 말랬지. 분홍색 머리의 아이가 엑스트라에게 짜증을 부렸다. 노란 머리의 남자아이는 미간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라이퀴아는 아이들을 무시하려 했지만 노골적일 정도로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에 겨우 '안녕'하고 두 음절을 내뱉었다. 메리메리라는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라이퀴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같이 놀자. 라이퀴아는 곤란한 얼굴로 선생님을 올려다 봤지만 선생님은 말갛게 웃는 얼굴로 라이퀴아를 마주 볼 뿐이었다.


 라이퀴아는 아이들의 손에 2층으로 끌려갔다. 선생님과 와루캥, 그리고 건물 안에 있던 다른 어른들은 말리는 기색이 없었다. 새 친구? 응. 날씨 좋으니까 밖에서 놀지? 레옹이 가져온 게임 같이 하려고. 그래, 화면 너무 가까이서 보면 안된다. 라이퀴아는 그대로 화면 앞에 앉았다. 게임을 처음 해본다는 라이퀴아의 말에 아이들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옹과 라이퀴아가 나란히 컨트롤러를 잡고, 라이퀴아에게 게임을 알려준다는 핑계로 메리메리가 반대쪽 옆에 앉았다. 어른들에게 간식을 받아온 엑스트라는 레옹과 라이퀴아의 뒤에 자리를 잡았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라이퀴아는 불편한 얼굴로 컨트롤러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아이들은 끈질기게 라이퀴아의 옆에 붙어있었다. 라이퀴아는 적당히 피하기를 포기하고 게임에 집중했다. 라이퀴아가 연패를 반복하는 동안 레옹과 메리메리, 엑스트라가 번갈아가며 옆자리를 채웠다. 나 언제까지 해? 라이퀴아가 두번째로 엑스트라와 맞붙게 됐을 때 물었다. 한번은 이겨봐야지! 엑스트라가 개구지게 웃으며 대꾸했다. 메리메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라이퀴아의 입에 간식을 넣어줬고 레옹은 부러운 듯 그 모습을 바라봤다. 라이퀴아는 요령이 좋은 편이었고, 금방 게임기를 다루는 것에 능숙해졌다. 첫 승리는 레옹에게서 따냈다. 메리메리가 라이퀴아를 끌어안았고, 레옹과 엑스트라도 와아- 환호성을 터트렸다. 라이퀴아는 얼떨떨한 얼굴로 자신의 캐릭터가 승리 포즈를 취하는 것을 바라봤다. 축하해, 아이들의 말에 라이퀴아의 뺨이 사르르 풀어졌다. 시끄러운 방안에 노크소리가 울렸다. 살짝 열린 문 틈으로 선생님의 얼굴이 보였다. 라이퀴아는 게임기를 내려놓고 선생님에게 다가갔다. 어느새 시간은 꽤 지나 있었다. 아이들이 아쉬움에 원성을 내뱉었고, 선생님은 미안한 듯 눈썹 끝을 내리며 미소지었다. 아이들은 굳이 내려와 돌아가는 라이퀴아를 배웅했다.


 "다음에 또 놀러와!"





 이슬레이는 아침에 말한 대로 저녁시간이 되기 전에 돌아왔다. 무슨 일인지 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반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슬레이는 허공에 다녀왔다는 인사를 하고는 가방을 풀었다. 저녁 만드는 중인가, 시간을 확인하고 부엌으로 들어가니 선생님과 라이퀴아가 나란히 소매를 걷어올린 채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저녁 메뉴는 햄버그 스테이크로 보였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뒤로 다가가 앞치마 끈을 풀었다. 형, 언제 왔어? 라이퀴아가 고개만 돌려 이슬레이를 바라봤다. 방금. 간단하게 대꾸한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에게 손을 씻게 하고는 자신이 대신 앞치마를 맸다. 선생님은 기분이 좋아보였다. 생글거리는 웃음은 항상 있는 것이었지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것은 드물었다. 굽는 건 제가 할게요.


 "무슨 좋은 일 있었어요?"


 이슬레이의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선생님의 웃음이 한층 더 깊어졌다. 라이퀴아한테 친구가 생겼어. 이슬레이는 그것이 이렇게나 신날 일인가 잠시 고민했다. 정작 라이퀴아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잘 익은 햄버그 스테이크를 담아 각각의 자리에 뒀다. 세 사람은 자리에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라이퀴아 친구 생겼어?"
 "...아마도?"


 선생님의 말과 달리 라이퀴아는 애매한 태도였다. 오늘 즐거웠지? 선생님의 물음에 라이퀴아는 분주하게 움직이던 입을 멈췄다. 동그란 눈동자가 생각에 잠겨 가라앉고, 고개가 기울어졌다. 이내 라이퀴아의 양 뺨이 빨갛게 물들고 눈가가 한껏 부드럽게 휘어졌다. 대답 대신 라이퀴아의 고개가 한번 끄덕였다. 사랑스러운 웃음에 선생님이 라이퀴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슬레이는 불퉁한 얼굴로 라이퀴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라이퀴아는 민망함을 숨기려는 듯 다시 분주하게 손과 입을 움직였다. 그러면 오늘 논 애랑 나랑 누가 더 좋아? 이슬레이가 일부러 심술을 부리며 물었다. 선생님이 제일 좋아. 라이퀴아는 눈도 깜작하지 않고 즉각 대꾸했다. 이슬레이의 손이 덜컥 멈췄다. 라이퀴아는 치켜뜬 눈으로 이슬레이를 한번 바라봤다가 장난스레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형도 좋아. 선생님이랑 형은 특별해. 다 다른 '좋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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