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구성원이 두명에서 세명으로 바뀌고, 제각각 생활에 적응하고 있었다. 이슬레이의 방에는 이층침대가 생겼고, 라이퀴아가 2층을 차지했다. 책상까지 꽉꽉 들어찬 방 안에 더 가구를 추가할 공간이 없었기에 옷을 담는 수납장은 선생님의 침실에, 책과 접이식 책상은 선생님의 서재에. 라이퀴아의 생활반경은 집안 곳곳에 흩어졌다.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은 거실이었다. 그 다음은 서재. 라이퀴아는 특별하게 외로움을 타는 아이는 아니었다. 홀로 집을 지킬 때면 혼자 게임하거나, 책을 읽으며 잘만 지냈다. 친구라도 생겨 놀다 들어오면 좋으련만 선생님이 슬그머니 얘기를 꺼내면 라이퀴아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선생님과 이슬레이는 단 둘이 살았을 때 그리 집에 오래 붙어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슬레이는 자기관리에 집중하는 편이었고 선생님은 일이 바쁜 사람이었다. 이슬레이가 더 어렸을 때는 최대한 이슬레이와 생활 시간을 맞췄지만, 이슬레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부터는 이슬레이가 먼저 학교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탓에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물론 그것은 두 사람이 살 때 이야기였다. 라이퀴아는 아직 초등학생이었고, 학교를 끝마치고도 두 세시간은 홀로 있어야 했다. 사고를 치거나 위험한 행동을 하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혼자 둬도 마냥 괜찮을 나이도 아니었다. 둘의 생각은 비슷했는지 한동안 빠른 귀가를 했다. 라이퀴아가 그것을 눈치채고 저 애 아니거든요, 하고 말렸지만 둘에게 라이퀴아는 애였다. 선생님과 이슬레이의 마음이야 어찌됐든, 가족 구성원이 바뀌었다고 일의 양이 줄어들거나 해야할 공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선생님은 때로는 출장을 나가기도 했고, 이슬레이도 공부가 잘 풀리지 않은 날은 학교에서 자습을 하고 돌아왔다. 가끔 선생님과 이슬레이가 모두 늦고 라이퀴아도 열쇠를 깜박 두고 나오는 운이 나쁜 날이면 라이퀴아는 동네에 있는 놀이터에서 시간을 때웠다. 집에서 대로변 방향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곳이었다. 이슬레이와 선생님이 항상 지나치는 길목이기도 했다.


 라이퀴아는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편이 아니었다. 놀이터 한켠에 마련된 정자에 앉아 책을 읽었다. 유난히 싹싹한 아이들이 종종 라이퀴아 쪽을 바라봤지만 라이퀴아는 책에 집중한 척을 하며 고개도 들지 않았다. 책을 읽기 힘들 정도로 어두워지면 아이들은 하나 둘 줄어들었고, 라이퀴아는 혼자 남고 나서야 책을 가방 안에 넣었다. 해가 진 후에는 제법 쌀쌀했다. 라이퀴아는 무릎을 당겨 안으며 힐끗 길가를 바라봤다. 놀이터 맞은 편 편의점 간판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빨간색 머리카락에 유니폼을 걸친 사람이 마찬가지로 라이퀴아 쪽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눈꼬리가 위로 쭉 뻗어있고, 미간은 한껏 찌푸린 상태였다. 무서운 표정에 라이퀴아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그 사람은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는가 싶더니 금방 다시 나왔다. 라이퀴아는 조금 긴장한 상태로 그 사람을 바라봤다. 그 사람은 유니폼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라이퀴아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온다. 기분 탓이겠지, 난 잘못한거 없는 걸. 오지마-


 "거기서 뭐 하는 거야."


 라이퀴아의 바람과 달리 그 사람은 라이퀴아에게 말을 걸었다. 표정처럼, 상냥함과는 거리가 먼 말투에 라이퀴아는 잠시 그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그 사람은 라이퀴아의 어깨가 한껏 움츠러든 것과 눈치를 살피는 듯 한 표정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고 제 미간을 꾹꾹 눌러 인상을 폈다. 얼굴과 달리 공격적이지 않은 태도에 라이퀴아의 어깨가 조금 풀어졌다. 라이퀴아는 그제서야 그 사람의 모습을 천천히 살폈다. 나이는 이슬레이와 비슷할까, 노을 탓에 빨간 곱슬머리가 타오르는 것 처럼 보였다. 노랗게 빛나는 이름표에는 편의점 로고 옆으로 에피타이저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조금 복잡한 시선이 라이퀴아를 내려다본다. 그 사람은 주머니에 넣어둔 것을 던지듯이 라이퀴아에게 줬다. 따뜻한 온기가 손에서부터 퍼져나갔다. 라이퀴아는 멍청한 표정으로 눈만 깜박이며 손 안으로 떨어진 두유를 바라봤다. 춥다, 들어가라. 라이퀴아가 인사를 하기도 전에 유니폼을 입은 몸이 돌아섰다. 손님 한명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주는거 먹으면 안된댔는데. 라이퀴아는 고민하며 손 안에 든 병을 주물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슬레이가 놀이터 앞을 지나갔고,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받은 두유는 결국 마시지 않았다. 버리는 것도 내키지 않았기에 라이퀴아는 그것을 식탁 위에 올려뒀다.





 라이퀴아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마중을 나올 사람도 같이 우산을 쓰고 갈 친구도 없었다. 라이퀴아는 중앙현관 계단에서 책을 펼쳤다. 적당히 비가 그치면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책은 다 읽었고, 슬슬 배가 고팠다. 선생님이든 이슬레이든 집에 돌아올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늦으면 걱정할텐데. 라이퀴아는 책가방을 앞으로 메고 달리기 시작했다. 몸을 때리듯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달리는 것은 꽤나 지치는 일이었다. 라이퀴아는 중간중간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에서 숨을 돌리고 다시 달리기를 반복했다. 라이퀴아는 놀이터 맞은편 편의점에서도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라이퀴아는 차일 아래에서 가게 안을 힐끔 들여다봤다. 카운터에는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라이퀴아는 머리를 털어내고 티셔츠를 쥐어짰다. 추위로 이가 딱딱 부딪쳤다.


 "역시, 그 때 걔네."

 "...에피타이저."


 라이퀴아 앞으로 얼굴이 불쑥 들이밀어졌다. 빨간 머리카락에 올라간 눈매. 겨우 두번째일 뿐이지만 기억에 남은 얼굴에 라이퀴아가 반사적으로 이름을 불렀다. 에피타이저의 눈썹이 비뚤게 올라갔다. 방금 전까지 카운터에 서 있던 사람은 유니폼 조끼의 지퍼를 내리고 있었다. 에피타이저가 그 사람에게 손가락 다섯개를 펴 보였고 그 사람은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지퍼를 다시 올렸다. 땡큐, 5분이면 되니까- 에피타이저가 소리를 지르며 건물에 딸린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카운터에 서 있던 사람이 사람좋게 웃으며 라이퀴아에게 손짓했다. 라이퀴아는 경계심이 가득한 얼굴로 가방만 끌어안았다. 에피타이저는 자신이 제시한 5분이 지나기 전에 다시 편의점으로 돌아왔다. 젖은 라이퀴아의 어깨를 거리낌 없이 끌어당기며 편의점 안으로 밀어넣는다. 뭐 이렇게 겁이 많아. 에피타이저가 라이퀴아의 머리 위에 수건을 올렸다. 섬유유연제의 달큰한 향기가 났다.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똑똑한거지. 카운터에 서 있던 사람이 라이퀴아 대신 대꾸했다.


 카운터 안 플라스틱 의자에 라이퀴아는 우두커니 앉았다. 커다란 타올이 담요처럼 라이퀴아의 몸을 감싸고 있었고 에피타이저의 거친 손놀림으로 머리카락은 얼추 말라있었다. 카운터에 서 있던- 에피타이저가 와루캥이라고 부른 사람은 라이퀴아가 지난 자리마다 생긴 물자국을 대걸레로 닦았다.


 "너 가출했냐"


 에피타이저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에피타이저는 라이퀴아가 놀이터에서 뛰어 노는 것도 아니면서 해가 질때까지 놀이터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종종 봤다. 이렇게나 비가 쏟아지는 날 학교가 끝나고도 한참이 지난 시간에 거리를 달리고 있는것도 목격했고, 라이퀴아의 가방 안에 들어있던- 혹시라도 젖었을까봐 말리려고 꺼내둔- 노트에는 5학년 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라이퀴아는 그보다 훨씬 어리고 마르게 보였다. 설마 할 것들도 여러개 모이니 의혹은 깊어졌다. 가출이라는 단어에 라이퀴아는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에피타이저로서는 마냥 믿을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부모님 번호 불러"

 "혼자 갈 수 있는데...요."

 "그러면 파출소나 청소년쉼터로 연락하는 거고."


 라이퀴아는 선생님을 귀찮게 만들까 싶어 고집을 부렸다. 선생님이 이런 것을 귀찮게 여기지 않는 사람인 것과는 별개로 라이퀴아가 신경을 쓰는 지점이 있었다. 에피타이저가 휴대전화를 꺼내 뭔가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010- 라이퀴아가 다급하게 선생님의 연락처를 말했다. 와루캥은 대걸레질을 마치고 나서야 유니폼을 벗었다. 에피타이저와 라이퀴아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고, 직접 바코드를 들어 사탕 몇개와 온음료를 결제한다. 먹으면서 해. 난 간다. 와루캥이 처음으로 두 사람의 말 사이에 끼어들었다. 산 것들을 두 사람 방향을 쭉 밀어준다. 에피타이저는 라이퀴아가 부른 연락처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아, 이걸 왜 오빠가 사요. 에피타이저가 전화의 마이크 부분을 손으로 막으며 와루캥에게 말했다. 타이밍 좋게 통화연결음이 끝나고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와루캥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편의점을 빠져나갔다. 사람 좋은 얼굴이 라이퀴아에게 손을 흔들었다. 라이퀴아는 조금 쭈뼛거리다 그 손짓에 마주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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