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험생의 공부 핑계와 어린 아이의 거북한 표정도 통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다 같이 장을 보러가자는 말에 이슬레이와 라이퀴아는 싫은 기색을 내비쳤으나- 선생님의 시무룩한 표정에 입술을 꾹 깨물고 옷을 갈아입을 뿐이었다. 라이퀴아는 먼저 옷을 갈아입고 나와 선생님의 손을 잡았다. 살갑게 제게 다가오는 라이퀴아의 모습에 선생님은 부드럽게 웃었다. 조심스럽게 손가락 끝만 닿은 손을 잡아당겼다. 작고 마른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고, 선생님은 라이퀴아의 엉덩이를 받쳐 안았다. 라이퀴아는 제 손을 어디에 둘지 모르고 허둥대다 겨우 선생님의 어깨를 잡았다. 따라 나온 이슬레이가 뒤로 쏠린 라이퀴아의 등을 밀었다. 그제서야 라이퀴아는 비교적 자연스러운 자세로 선생님의 상체에 몸을 기댔다. 이슬레이는 마지막으로 문단속을 하고 조금 앞서 걸었다.


 "안고 내려가시게요?"

 "주차장까지만~"


 라이퀴아는 민망한 듯 귓바퀴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주 잠깐 바둥거리긴 했지만 선생님이 엄살을 부리며 아파하자 잔뜩 겁먹은 토끼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이슬레이가 뒷좌석의 문을 열자 그제서야 선생님은 라이퀴아를 내려놨다. 라이퀴아는 달아나듯 차에 올라탔다. 조수석에는 잡동사니가 쌓여있었고,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옆에 앉았다. 이슬레이가 라이퀴아의 안전벨트를 매 주기 위해 다가가자 라이퀴아가 움찔 놀라며 몸을 좌석에 딱 붙였다. 뭘 자꾸 놀라, 능청스러운 이슬레이의 태도에 라이퀴아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슬레이가 상냥했다. 선생님은 이슬레이에게 라이퀴아를 맡기고는 주차할 공간을 찾아 다시 차를 몰았다. 1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합류하기로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들은 먼저 차에서 내렸다. 이슬레이는 차 문을 잡아주고, 라이퀴아를 차도 반대쪽에 걷게 했으며, 턱이 있는 곳마다 나긋한 목소리로 조심하라 말했고, 꽤 다정한 태도로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런 태도와 반대로 라이퀴아는 점점 표정이 일그러졌다. 반듯하게 생긴 얼굴이 라이퀴아를 내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휠 때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주말이라 그런지 대형마트의 안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나란히 손을 잡고 서 있는 이슬레이와 라이퀴아를 몇몇 사람들이 돌아봤다. 대부분은 이슬레이의 얼굴을 향했고, 라이퀴아는 그것을 이해했다. 다만 머리로 이해한 것과 달리- 라이퀴아에게 그린 듯 한 이슬레이의 미소는 단단히 자신을 체하게 만든 저녁식사를 떠올리게 만들 뿐이었다. 이슬레이에게 잡혀있을 뿐인 손에 힘이 들어갔다. 라이퀴아가 이슬레이의 손을 두어번 잡아 당기자, 이슬레이는 무릎을 반쯤 굽혀 라이퀴아에게 머리를 기울였다. 형이 상냥하네, 넉살 좋은 어르신이 지나가며 웃었고 라이퀴아는 어색하게- 이슬레이는 풋풋하게 웃었다.


 대체 왜 그래요? 라이퀴아는 안 그래도 작은 목소리를 한껏 낮춰 속삭였다. 이슬레이는 그런 라이퀴아를 지긋이 바라보다니 핫, 하고 터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이슬레이의 눈썹이 위로 올라가며 가늘게 선이 생겼다. 상냥함과는 거리가 먼 표정이었지만 라이퀴아는 그 표정을 보는 것이 훨씬 편했다. 라이퀴아가 한 행동을 흉내내 이슬레이가 라이퀴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래야 내가 더 착하게 보일거 아냐. 라이퀴아는 입을 다물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이슬레이를 바라봤다. 딱 벌어진 입을 이슬레이가 닫아줬다.


 "선생님은 남들 입에 오르내리기 쉬운 사람이거든."


 내가 이야기를 보탤 필요는 없지.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말을 모두 이해한 것은 아니었만, '선생님'이라는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슬레이의 작은 움직임에도 움찔움찔 놀라던 라이퀴아가 먼저 이슬레이의 손을 잡았다. 이슬레이는 연신 입꼬리를 끌어 올리던 것을 멈추고, 작은 손을 맞잡았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없이 선생님이 오기를 기다렸다. 선생님이 쇼핑카트를 끌고 나타나자 라이퀴아는 바로 선생님에게 달려갔다. 이슬레이의 손은 여전히 라이퀴아에게 꽉 잡힌 상태여서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상체가 기울었다. 놓지 않는구나. 넘어질 뻔 했는데도 드는 생각은 그것 뿐이었다.


 단지 한 사람이 늘었을 뿐이지만 살 물건은 제법 많았다. 욕실 용품과 새로운 식기, 딛고 오르내릴 등받이가 없는 작은 의자. 카트가 점점 라이퀴아를 위한 물품들로 채워졌다. 점점 흥분한 선생님이 침대를 들여놓을까, 방이 하나 더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갈까- 하는 말을 꺼냈을 때, 라이퀴아는 선생님이 산 물건들을 하나하나 선반으로 다시 돌려놨다. 최소한으로 필요한 물품만 남겨두고도 라이퀴아는 불편한 표정이었다. 선생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고, 이슬레이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장난감 코너에서는 라이퀴아가 가지고 싶은게없다고 하자 종류별로 모조리 쓸어담으려는 선생님을 이슬레이가 제지했다. 라이퀴아는 먼저 바삐 발을 놀려 장난감 코너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적어도 옷은 사자."


 선생님은 라이퀴아를 뒤에서 낚아채 듯 안아올렸다. 발 끝이 들린 라이퀴아가 고개만 돌려 선생님을 올려다봤다. 응? 제발- 선생님이 재차 라이퀴아의 대답을 재촉하자 그제서야 라이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퀴아는 아동복 코너에서 오래 살피는 것도 없이 가장 가까이에 있던 옷을 집어들었다. 가장 저렴한 가격표가 붙은 바지는 선명한 민트색이었고, 이슬레이는 난폭하게 그것을 뺏어 제자리로 돌려놨다. 그건 아니지. 그나마 제 편을 들어주던 이슬레이가 가차없이 말했다. 몇 번의 갈아입히기 끝에 결국 대부분의 옷을 결정한 것은 이슬레이였고, 라이퀴아가 가격표를 확인하기도 전에 선생님은 카트 안쪽으로 옷을 밀어넣었다. 라이퀴아가 가격을 확인할 수 있었던 건 가장 마지막에 직접 고른 토끼무늬 잠옷 뿐이었다. 배신자. 라이퀴아가 소리없이 입만 벙긋거리며 이슬레이를 비난했다. 이슬레이는 입꼬리를 비틀어올리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세 사람이 집에 도착한 것은 저녁 식사시간이 다 되어갈 쯤이었다. 마트를 나오고도 수납장과 접이식 책상, 침대 등을 보기 위해 가구점을 몇군데나 들락거린 탓이었다. 선생님과 이슬레이는 양 손도 모자라 팔과 몸 사이에 끼워야 할 정도로 짐을 한가득 들고 있었고, 라이퀴아가 허둥지둥 집 문을 열었다. 식재료가 담긴 봉지만 바로 부엌을 향했고, 나머지는 거실에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선생님은 줄 끊어진 인형처럼 소파 위로 늘어졌다. 이슬레이도 잠시 벽을 짚고 서서 자신의 어깨를 두드렸다. 냉장고는 새로운 식재료들로 가득 찼지만, 저녁은 배달 음식이었다. 이슬레이는 수납장의 조립설명서를 들여다봤다.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은데- 귀찮은 일을 빨리 해치워버리고 싶은 생각과 피로감을 저울질한다. 이슬레이가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선생님이 거실에 앉아 상자를 뜯기 시작했다. 이슬레이는 자동으로 선생님의 옆에 앉았다. 라이퀴아도 둘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작은 크기의 수납장은 만드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부품을 맞춰 나사를 조이는 것 보다 흔들리지 않게 바짝 끼우는 것이 더 힘들었다. 대강의 모양이 잡히고 타이밍 좋게 벨이 울렸다. 선생님이 음식을 받으러 가고, 이슬레이는 그동안 거실을 치웠다. 부품들을 감싸고 있던 스티로폴과 박스를 분류해 쌓아둔다. 오늘은 뭘 버리는 날이더라, 기억을 더듬고 있자 라이퀴아가 이슬레이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형, 선생님이 밥먹고 같이 치우재."


 라이퀴아가 처음으로 이슬레이를 불렀다. 알게 된 지 겨우 이틀째지만 라이퀴아는 이슬레이를 단 한번도 부른 적이 없었다. 할 말이 있을때면 돌아볼 때 까지 가만히 바라보거나, 저기- 하고 흐린 감탄사로 부를 뿐이었다. 어물어물 말 끝을 흐리는 듯한 존대도 아니었다. 끝이 처진 눈매가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이슬레이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슬레이는 얼떨떨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이 우스워 라이퀴아는 푸스스 바람이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순진하게 풀어진 뺨에 생기가 돌았다. 얘들아, 주방에서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라이퀴아는 먼저 등을 돌려 주방을 향했다. 빨리와, 형. 이슬레이는 어쩐지 그 목소리가, 그 웃음이 귓가를 계속 맴도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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