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퀴아가 가족의 틀에 들어온지 두 해가 되어가는 겨울이었다. 아이의 깡마른 몸에는 살이 붙었고, 처음 가져왔던 옷들은 길이가 깡총해져 더 이상 입을 수 없었다. 여전히 또래보다 작고 가벼운 덩치였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눈치를 살피느라 분주하게 눈을 굴리는 습관은 없어졌고 대신 눈가를 가늘게 만들며 웃고 다녔다. 너 점점 선생님 닮아간다, 이슬레이가 지나가듯 하는 말에 라이퀴아는 더 활짝 웃고는 했다. 스피어 나이츠 공방 아이들의 손에 반쯤 억지로 이끌려 친구들도 생겼다. 대부분은 알음알음 인사만 하는 사이였지만 일부러 거리를 두기 위해 얼굴을 굳히는 일도 없었다. 메리메리와 레옹이 먼저 졸업을 해 교복을 입게 된 이후로는 주로 엑스트라와 같이 다녔다. 게임에 능숙해진 라이퀴아가 신기록이라도 내는 날에는 한동안 주인공의 호칭이 라이퀴아의 뒤를 따라다녔다. 비숍, 영웅, 용사님- 라이퀴아가 민망함에 몸서리를 쳐 봤지만 그만두기는 커녕 공방 전체가 따라 라이퀴아의 별명을 외쳤다. 종종 반찬을 나눠주러 공방을 찾아오는 에피타이저만 그 놀림에 참가하지 않았기에 라이퀴아는 에피타이저의 뒤에 딱 붙어있고는 했다.


 에피타이저는 아이들을 썩 잘 돌보는 타입이 아니었지만 항상 인기가 좋았다. 귀찮아! 소리를 지르며 집어던지거나 기술을 거는 날도 많았지만 크게 다치는 경우는 없었고, 오히려 아이들은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들이 눈을 빛내며 조르면 기술을 알려주기도 했다. 라이퀴아가 유난히 에피타이저를 따르는 탓에 삐죽거리는 메리메리도 그럴 때는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이거 배워서 사람 패고 다니면 맞는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에도 아이들은 싹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날도 라이퀴아는 에피타이저에게 새로운 관절기를 배우고, 가장 빨리 요령을 익혔다. 한동안 영웅이라고 불리며 놀림받은 것에 대한 복수로- 라이퀴아는 와루캥이 가져다 준 간식을 와작거리며 다른 아이들이 애쓰는 모습을 구경했다. 


 레옹이 복수전을 성공하기 전에 라이퀴아는 자리를 떴다. 곧잘 있는 일이었다. 주말이면 라이퀴아는 점심시간 전후로 집에 돌아갔다. 이슬레이는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었고, 많은 시간을 책상 앞이나 도서관에서 보냈다. 단 한 번도 집안일을 안하겠다는 말은 안했지만 어련히 선생님과 라이퀴아가 이슬레이 몫의 일을 빼앗고 있었다. 평소라면 알아서 한다며 날을 세웠을 이슬레이도 중요한 시험을 앞둔 시점에는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그 시험은 몇일 전에 끝났지만 이제 막 짐 하나를 덜어둔 사람에게 바로 일을 맡기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다.


 "다녀왔습니다-"


 라이퀴아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인사했다. 선생님은 연말이면 항상 바빴고, 이슬레이도 시험이 끝나고 처음 맞은 주말이니 어디론가 외출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라이퀴아의 예상대로 대답은 들리지 않았지만 현관에는 이슬레이의 신발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라이퀴아는 고개를 갸웃하고 신발장을 열었다. 다른 신발들도 제 자리를 차곡차곡 지키고 있었다. 라이퀴아는 던지듯이 신발을 벗어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이슬레이가 책상 앞에 앉아 이마를 짚고 있었다. 형, 귀가 좋은 이슬레이가 자신의 인사를 못 들었다는 것이 이상해 라이퀴아는 이슬레이를 불렀다. 의자에 앉아있던 이슬레이의 몸이 반쯤 돌아갔다. 언제 왔어, 이슬레이의 목소리는 조금 갈라져 있었다. 라이퀴아는 잰걸음으로 이슬레이에게 다가서 이마에 손을 얹었다. 확연히 알 정도로 체온이 높았고,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라이퀴아는 그대로 이슬레이의 팔을 잡아 끌었다. 방 안에 있는 책상에서 침대로 이동하는 것 뿐인데도 이슬레이의 걸음이 갈지자를 그렸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가 이끄는 대로 침대에 걸터앉아 색색 숨을 몰아쉬었다.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옷장을 뒤져 편한 옷을 꺼내 이슬레이에게 집어던졌다. 평소라면 모양 빠지게- 라며 한마디를 했을 이슬레이가 암전히 옷을 받아들었다. 미련하게. 라이퀴아는 자신이 끙끙 앓을 때 마다 들었던 말을 그대로 이슬레이에게 돌려줬다. 이슬레이는 아무런 말도 없이 땀에 젖은 셔츠의 단추를 끄렀다.





 라이퀴아는 곧잘 병치레를 했다. 그리고 아픈 것을 잘 티내지 않는 편이었다. 혼자 끙끙 앓다가 이슬레이나 선생님에게 들켜 혼나고는 했다. 안타깝게도 들키지 않은 적은 없었다. 선생님은 아프면 바로 아이들에게 말을 하고 혼자 추스르는 타입이었고, 들키지 않은 것인지 정말 한번도 아파보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으나- 이슬레이는 좀처럼 아프지 않았다. 아프기 이전에 흐트러진 모습도 드물어서 라이퀴아는 조금 흐트러진 이슬레이의 모습이 신기했다. 라이퀴아의 잔병치레 탓에 상비약은 항상 넉넉했다. 가장 좋은 것은 병원에 가는 것이겠지만- 방 안에서 움직이는 것도 비틀거리는, 머리 하나 이상은 더 큰 사람을 병원까지 데려갈 재주는 아직 초등학교 6학년인 라이퀴아에게 없었다. 선생님에게도 연락을 넣어 봤지만 전원이 꺼져있다는 목소리만 휴대전화 너머로 전해졌다.


 설거지 통이나 식기 건조대나 무언가를 해 먹은 기색은 없었다. 라이퀴아는 일단 물과 이온음료를 가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슬레이는 아픈 와중에도 반듯하게 앉아있었다. 미간이 조금 찌푸려진 채 마른 숨소리만 일정하게 낸다. 라이퀴아가 침대 가에 앉아 매트릭스가 흔들리자 그제서야 이슬레이의 눈이 뜨였다. 라이퀴아가 물을 따서 넘기자 이슬레이는 느리게 그것을 마셨다. 삼키기도 힘겨운 듯 목울대가 크게 한번 움직이고 멈추기를 반복했다. 상태를 봐서는 뭔가를 먹는 것도 힘겨워 보였지만 빈 속에 약을 먹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점심은-"

 "자꾸 들락거리지마. 옮는다."


 라이퀴아의 말을 끊고 이슬레이가 내쫓는 손짓을 했다. 내가 그런 말 할때는 눈도 깜박 안했으면서. 라이퀴아는 불퉁한 얼굴로 방을 빠져나갔다. 라이퀴아가 나가고 나서야 이슬레이는 입을 가리고 밭은기침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다시 열렸다. 들어오지 말라니까, 이슬레이의 잔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라이퀴아가 옆에 앉았다. 상비약과 부드러운 빵이 쟁반에 놓여 있었다. 아주 잠깐 죽이나 스프 같은 것을 직접 요리할까 했으나 라이퀴아는 그런데에 재주가 없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정성을 쏟기에는 자신을 쫓아내는 이슬레이가 얄미웠다. 먹는거 볼 때까지 안나가. 라이퀴아가 빵을 이슬레이의 입가에 들이밀며 말했다. 이슬레이는 얼굴을 잠시 일그러트렸다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그 빵을 받아먹었다. 목 안쪽이 마른 탓에 음식을 씹어 삼키는 것이 힘겨웠다. 잘했어, 라이퀴아가 입을 벌리며 소리없이 웃었다. 눈매가 부드럽게 휘는 모양이 점점 선생님을 닮아가고 있었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가 건네는 약을 받아 입에 머금었다.


 "알아서 먹어, 이제 나ㄱ-"

 "내가 걱정 돼?"


 그걸 말이라고- 이번에는 역으로 제 말이 끊긴 이슬레이가 불쾌한 표정으로 물과 약을 삼켰다. 물을 아무리 마셔도 갈라진 목소리는 잘 돌아오지 않았다. 너 감기에도 엄청 앓잖아, 오늘은 선생님 방에서 자. 이슬레이의 말을 한 귀로 넘겨 들으며 라이퀴아가 이슬레이의 어깨를 눌렀다. 알았어. 알았으면 나가. 형도 나 아플때 꼭 안 나갔잖아. 의미없는 투닥거림이 오가고 라이퀴아는 억지로 눕힌 이슬레이의 몸에 이불을 잘 덮어줬다. 자는 것만 보고 나갈게.


 누구를 닮았는지. 이슬레이가 한숨처럼 말하고는 눈을 감았다. 라이퀴아는 웃으며 빈 페트병과 남은 빵 따위를 한데 모았다. 모두 자신이 받은 일들이었다. 라이퀴아는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누군가를 닮아간다 표현한다면 라이퀴아는 두 사람을 모두 닮아가고 있었다. 열을 재는 조금 서늘한 손, 상냥하지는 않지만 성가실 정도로 신경을 쓰는 태도, 열이 내려 눈을 떴을 때 눈에 보이는 다정한 얼굴. 선생님이라고 생각했던, 열에 들떠 정신이 없는 와중에 맞잡은 손의 온기가 이슬레이 였을 때는 라이퀴아도 조금 놀랐었다. 라이퀴아는 살짝 이슬레이의 손을 잡았다. 옮는다니까, 피곤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이슬레이가 중얼거렸다. 이슬레이는 닿은 손을 한번 꽉 쥐었다 놓았다. 이내 이슬레이의 호흡이 일정해졌다. 라이퀴아는 조심스럽게 이슬레이의 눈 앞에 손을 흔들었다. 평소라면 잠든 와중에도 금방 깨겠지만, 열과 약기운 탓인지 이슬레이는 꼼작도 하지 않았다.


 형, 이제 누가 안봐도 나한테 다정한거 알아? 라이퀴아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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