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상적인 아이였다. 수려한 용모, 단정한 옷차림. 태도는 나긋했고, 우수하다는 수식어는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 아이의 행동이 주변 어른들의 눈에 거슬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그 애가 괜히 그랬겠어요'라는 말을 듣는 것이 이슬레이였다. 어른들의 상상 속 이상적인 아이. 주변에 모이는 사람은 끊이지 않았지만 투명한 벽이 있었고, 그 벽이 이슬레이에게 묘하게 압도적인 인상을 부여했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이슬레이는 만화나 소설 속에서 튀어나온 사람이라고 해도 믿겨질 정도였다. 스스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이용하기까지 했다. 사실상 이용하기 위해 모든 것을 쌓아왔다 해도 틀리지 않았다. 다만, 모든 것을 쌓는 과정이 어렵지 않을 정도로 우수했을 뿐. 지나치게 영리한 아이는 자신이 모르는 것이 없다는 착각에 빠지고는 했다. 부딪치고 깨질 구석이 없는 아이는 더욱 그랬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예민함을 좋아했다. 그것은 선생님과 아이들 사이를 나누는 분명한 경계였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사랑했고, 아이들 역시 그랬다. 선생님의 사랑은 너무도 다정했기에 아이들은 그 다정함에 매달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은 아이들만의 비밀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비밀은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다. 라이퀴아가 시비를 걸어온 동네 아이를 울린 일, 실수로 공방의 유리창을 깬 일 등- 작은 악행들은 모두 이슬레이만이 알고 있었다. 선생님에게는 쉽게 하지 못하는 투정도 이슬레이에게는 허락됐다. 라이퀴아는 여전히 사람을 경계하면서도 선생님과 이슬레이에게는 부드럽게 풀어졌다. 라이퀴아의 눈이 부드럽게 미소짓는 순간은 아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라이퀴아가 무게를 실어 팔에 매달리고, 장난을 치는 것은 오직 이슬레이 뿐이었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그런 모습을 알고 있는 유일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자신은 특별하다는 우월감. 라이퀴아에게 있어 선생님과는 다른, 중요한 존재라는 확신. 라이퀴아의 그런 태도는 이슬레이의 착각을 부추겼다. 이슬레이는 함부로 자신이 라이퀴아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라이퀴아는 자신과 다를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레이는 감히 라이퀴아가 상처받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슬레이는 함부로 라이퀴아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라이퀴아 또한 자신을 다 알고 이해할 것이라고.





 라이퀴아가 이슬레이의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교복이 담겨있는 종이가방만이 이슬레이의 걸음을 따라 흔들리며 한두번 부딪치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이슬레이의 몸에서 내려온 라이퀴아는 이 집에 처음 온 날처럼 조금 굳은 뺨으로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라이퀴아의 손은 이슬레이의 옷자락을 잡을 듯 뻗었다가 허공을 쥐며 멈추었다. 이슬레이는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가 외투를 걸어두었다. 라이퀴아는 현관에 걸터앉아 한박자 느리게 신발을 벗었다. 검은 눈동자가 특별할 것도 없는 현관을 의미없이 관찰했다. 이슬레이의 신발은 문 밖을 향해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현관의 센서등이 꺼지며 순간 어둠이 찾아왔다. 딸깍, 스위치를 누르는 소리와 함께 라이퀴아의 등 뒤가 밝아졌다. 뒤에서부터 뻗어진 커다란 손이 라이퀴아의 이마를 짚었다. 인기척에 현관 센서등에 다시 빛이 들어왔다. 라이퀴아의 이마는 조금 축축했다. 이슬레이의 손은 그대로 라이퀴아의 이마를 훔쳐내는 듯 하더니 둥근 뺨과 목덜미에 이어 손을 가져다댔다.


 "...열나네."


 검은 고수머리는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가 이슬레이의 손이 닿은 모양을 따라 헝크러졌다. 이슬레이는 멍하니 서 있는 라이퀴아의 몸을 잡아끌었다. 라이퀴아의 발에 반쯤 걸쳐져 있던 신발 뒷축이 끌리며 내팽개쳐졌다. 한번 타일 바닥에서 달각이며 튀어오른 신발은 가지런한 이슬레이의 신발을 밀어냈다. 한 짝은 이슬레이의 신발 앞에 가로놓이고 다른 한 짝은 이슬레이의 신발 위를 덮었다. 라이퀴아는 이슬레이가 라이퀴아의 외투를 벗겨내는 동안 그 신발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센서등이 꺼지고 나서야 라이퀴아는 고개를 돌렸다. 모양 좋은 눈썹이 조금 일그러진 채 라이퀴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손이 얼음장보다 더 차갑게 닿는 것을 깨닳고 나서야 자신의 열을 알아차렸다. 라이퀴아는 열 탓에 마른 입안을 혀로 훑었다. 입안에서는 조금 단내가 나고 있었다. 이슬레이는 어울리지 않게 부산을 떨며 욕실과 거실, 방 따위를 돌아다녔다. 욕실의 난방을 켜두고, 방에서 잠옷을 꺼내왔다. 오며가는 동안 틈틈이 라이퀴아의 이마를 쓸어내렸고 증세를 물었다. 라이퀴아와 눈을 마주칠 때면 서늘한 색의 눈동자가 얼핏 다정하게도 보이는 빛을 띄었다. 혼자 씻을 수 있겠어? 라이퀴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슬레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욕실로 향하는 라이퀴아의 뒤를 따랐다. 그러지마, 라이퀴아는 목소리를 내려고 했으나 열기를 띈 숨소리만 갈라진 채 새어나왔다. 결국 라이퀴아는 말 대신 욕실 안에 들어가 문을 걸어잠그는 것으로 대답했다.


 라이퀴아는 따뜻한 물을 머리 위로 끼얹었다. 개운한 기색 없이 물을 끼얹을 수록 몸의 열만 오르는 것 같았다. 어질어질한 머리 탓에 라이퀴아는 느린 동작으로 몸을 씻었다.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훔쳐내고, 머리를 털었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 탓에 몸에는 여전히 축축한 물기가 남아 있었고, 그런 상태에 입은 잠옷은 기분나쁘게 몸에 달라붙었다. 라이퀴아는 찝찝한 얼굴로 욕실을 나갔다. 거실에는 이슬레이가 꺼내둔 약과 물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라이퀴아는 그것들을 못본 척 하며 소파 위로 몸을 눕혔다. 머리가 복잡한 탓에 이슬레이가 있는 방으로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가 본질적으로 자신과 더 같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라이퀴아는 이슬레이도, 스승님도 아닌 라이퀴아였다. 스승님만큼 호인도 이슬레이만큼 이상적인 아이도 아닌 라이퀴아.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에게는 상처가 되지 않을 일에도 상처받을 수 있는 아이였다. 이슬레이에게 라이퀴아는 이해자였지만, 라이퀴아에게 이슬레이는 이해자가 되어주지 못했다. 형, 라이퀴아는 입 안으로 단어를 중얼거렸다. 이슬레이 형, 라이퀴아의 입술은 소리없이 달싹거리며 움직였다. 라이퀴아의 부름은 아무런 소리도 없었지만 그에 반응하는 것 처럼 방의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라이퀴아는 잠에 든 척, 눈을 감았다. 문의 경첩이 움직이는 소리, 다가오는 발소리,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조금 차가운 손.


 "약도 안 먹고, 머리도 안 말리고."


 작게 한숨소리가 들렸다. 라이퀴아의 등 뒤로 이슬레이의 팔이 들어왔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상체를 받쳐 안았다. 라이퀴아는 많이 자라고도 이슬레이보다 한참이 작았고, 가벼웠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를 앉혀둔 채 마른 수건과 헤어 드라이어를 가져왔다. 형, 라이퀴아가 눈을 뜨며 이슬레이를 불렀고, 이슬레이는 라이퀴아가 잠들어있지 않았다는 것에 놀라는 기색도 없이 대꾸했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머리 위로 마른 수건을 덮었다. 머리카락에서 방울져 떨어져 뺨을 적신 물을 꼼꼼하게 닦아냈다. 꺼내둔 약을 먹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라이퀴아는 알록달록한 캡슐과 이슬레이를 번갈아 바라봤다. 혼자서 아파야 하는데. 라이퀴아의 손이 꼼지락거리는 것에 따라 손 안에서 캡슐이 굴렀다. 


 "꼭 나가야 해? 우리는 가족이잖아"

 "선생님 같은 말을 하네."


 라이퀴아는 열에 목 안쪽이 마른 탓인지, 아니면 불안감 탓인지 쥐어짜내는 듯이 겨우 말했고, 이슬레이는 주저없이 대꾸했다. 이슬레이의 말에 라이퀴아는 입을 다물었다. 선생님과 자신은 다르다는 듯한 목소리. 라이퀴아는 선생님이 가족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순간들을 떠올렸다. 발 끝까지 온기가 도는 듯한 다정한 말. 이슬레이는 그 말들을 선생님 같다고 표현했다. 마치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한- 라이퀴아는 생각을 억지로 없애지도, 더 이어나가지도 않으며 약을 입에 머금었다. 너는 날 이해해 줄 거지? 이슬레이가 길에서 물었던 말을 라이퀴아는 다시 곱씹었다. 이해해주지 않는 나는 싫어? 라이퀴아는 그 생각을 말로 내뱉는 대신 약을 삼켰다. 이슬레이를 붙잡고 싶은 마음과 떠나려는 것에 대한 원망, 그런 원망에도 불구하고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혼란스럽게 섞여 들었다. 라이퀴아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마른기침만 했다.


 이 날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침대를 빌렸다. 본인은 원하지 않았지만 이슬레이가 억지로 라이퀴아를 자신의 침대에 잡아눌렀다. 발목 아프다며, 열도 나고 위험하니까 1층에서 자. 이슬레이의 말에 라이퀴아는 그 정도는 아니라며 잠시 몸부림을 쳤지만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어깨를 힘있게 잡아누를 뿐이었다. 이슬레이는 누운 라이퀴아의 옆에 잠시 앉아있었다. 서늘한 손이 약기운을 확인하며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이슬레이가 몸을 일으키자 매트리스의 용수철이 끼그덕거리는 소리를 냈다. 라이퀴아는 약기운이 올라 조금 몽롱해진 눈으로 이슬레이를 바라봤다. 이슬레이가 방 밖으로 나가는 뒷모습을 붙잡지 않기 위해, 이슬레이를 형이라 부르지 않기 위해, 투정을 부리지 않기 위해- 라이퀴아는 입안의 여린 살을 짓씹었다. 아직 어린 라이퀴아는 이제 혼자 아프는 법을 배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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