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호인이었다. 따뜻했고, 다정했고, 함께 있으면 즐거운 사람이었다. 미련하게도 보일 만큼 부드러운 성정과- 그래도 상관 없을 만큼의 유능함이 있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평생을 굴곡 없이 살아온 인생이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부유하고 평화로운 가정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 어릴 때 부터 영특함을 보였고, 성인이 되어서도 승승장구 하고 있었다. 상냥한 성격 탓에 좋은 이유이든 나쁜 이유이든 주변에 사람이 많이 모였다. 모자란 것이 없었기에 나누는 것을 당연히 여기기도 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누구인가 비꼼을 담아 그렇게 말하기도 했지만 그는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일 뿐이었다. 그는 특별한 사명감이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모든 것에서 초연했고 이상하리만치 교과서적이었다. 그렇기에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동향의 오랜 지인 부부가 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후, 그는 부부의 아이를 받아들이기를 원했다. 부모의 장례식장에서 아이는 정장 대신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 아이의 기억에 그는 몇 번 인사를 나눈 사람일 뿐이었다. 같이 가자, 이슬레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부모의 초상을 끌어안은 아이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동정인가요? 아이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물었다. 피곤함이 서린 뺨에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 아이는 그를 올려다봤다. 상냥한, 그렇기에 속을 알 수 없는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의 대답은…


 이슬레이는 잠에서 깨어났다. 꿈은 미완성인 상태로 끝맺어졌지만 이슬레이는 그 대답을 기억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곱씹은 기억이었다. 그는 이슬레이가 필요하다 말했다. 갈 곳 없는 아이가? 어린 이슬레이는 그 의문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었다. 이용해도 상관없다는 의미였고, 상냥한 미소에 대한 각인이었다. 선생님은 가족을 원했다. 자라나는 이슬레이에게 선생님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들을 줬다. 이슬레이는 벅찰 정도로 쏟아부어지는 애정을 지탱하고자 그를 선생님이라 불렀다. 가족을 원하는 선생님에게는 야속한 일이었지만, 이슬레이는 그 호칭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확인했다. 이슬레이는 선생님의 이유도 이유 없이 쏟는 애정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특별하게 이슬레이가 비정한 성격인 것이 아니라- 타고난 성정이 달랐다. 선생님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호인이었다. 자신이 받는 것들이 모두 빚이 되어 이슬레이의 발목을 잡아 끌었다. 그렇기에 이슬레이는 좋은 아이가 되기 위해 애썼다. 선생님이 원하는 가족을 이루고, 라이퀴아를 동생으로 귀여워해주고 싶었다.


 "형, 아직 자?"


 라이퀴아가 이층침대 난간에 매달려 고개를 내밀었다. 위험하게,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이슬레이가 몸을 세우며 아프지 않게 라이퀴아의 이마에 박치기를 했다. 라이퀴아는 제 이마를 문지르며 아래로 드리웠던 상체를 일으켰다. 이슬레이가 이불을 정리하는 사이 라이퀴아는 사다리의 두어칸을 내려오다 중간즘에서 한꺼번에 뛰어 내려왔다. 발바닥 전체로 무게가 실려 가느다란 발목이 움찔 떨렸다. 그러다 다친다. 이슬레이가 한 손으로 라이퀴아의 두 뺨을 꾹 잡아눌렀다. 라이퀴아는 붕어처럼 입술을 삐죽 내민채 이슬레이를 올려다봤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와 눈을 마주친 뒤 발목을 향해 턱짓했다. 괜찮다는 말 대신 발목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라이퀴아는 메리메리와 레옹이 다니는 중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학교에서 보낸 우편물을 확인한 후 선생님은 옷장을 뒤졌다. 낯익은 블레이저와 바지에 이슬레이는 눈을 깜박였다. 이거 안 버렸어요? 이슬레이의 질문에 선생님이 부드럽게 웃었다. 옛날 생각나지- 이슬레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이 TV를 보고 있는 라이퀴아를 손짓으로 불렀다. 라이퀴아는 쪼르르 다가와서는 두 사람이 찾아낸 것을 확인했다. 라이퀴아가 들어갈 학교의 교복이었다. 이슬레이는 어려서부터 키가 큰 편이었고, 라이퀴아는 또래보다 작았다. 이슬레이가 입었던 교복 블레이저는 셔츠가 아니라 두툼한 맨투맨 위에 입었는데도 품이 남았다. 라이퀴아의 두 팔을 쭉 뻗게 만들자 소매 끝이 헐렁하게 늘어졌다. 바지는 입어볼 것도 없었다. 수선해도 못 입겠네. 선생님이 즐거운 어투로 말했다.


 "우리 막내는 언제 다 크지?"


 선생님은 라이퀴아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라이퀴아는 괴로운 듯 막힌 소리를 내며 고개를 바르작거리기는 했지만 억지로 품을 빠져나오지는 않았다. 장난스럽게 쪽쪽 소리를 내며 선생님의 입술이 라이퀴아의 이마에 기습적으로 닿았다 떨어졌다. 으악, 라이퀴아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비명을 질렀다. 팔락거리는 소매가 선생님의 등을 때렸다. 이슬레이는 소리없이 눈을 반짝이고는 슬쩍 다가섰다. 라이퀴아는 조금 과격한 손짓으로 제 얼굴을 향해 다가오는 이슬레이의 입가를 막았다. 도망치려 해도 등 뒤가 선생님에게 막혀 있었다. 선생님은 여전히 사람좋게 웃으며 라이퀴아도 이슬레이도 돕지 않았다. 이슬레이는 눈가를 가늘게 만들며 라이퀴아를 내려다봤다. 그대로 시선은 라이퀴아에게 고정한 상태로 이슬레이가 고개를 틀었다. 모양이 고운 옆선이 라이퀴아의 손바닥에 파묻혔다. 라이퀴아의 손가락에 축축한 살덩이가 닿았다. 놀란 라이퀴아가 손을 빼냈고, 자신을 막는 손이 사라지자 이슬레이는 얼굴을 바짝 붙여왔다. 그대로 라이퀴아는 코를 깨물리고 말았다. 라이퀴아의 발끝이 이슬레이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라이퀴아는 똑같이 놀림받더라도 선생님에게는 유난히 약했기에 이슬레이는 자신만이 얻어맞을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라이퀴아는 놀리는 재미가 있는 아이였다.


 라이퀴아는 자신이 놀림받은 것을 마음에 오래 담아두는 편이 아니었다. 선생님과 이슬레이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코 주위에 잇자국이 남은 채 사나운 표정으로 TV를 노려보는 라이퀴아를 내버려뒀다. 두 사람의 생각대로 라이퀴아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의 주제가가 두번째로 들릴 때 쯤에는 사나웠던 얼굴이 꽤 풀어져 있었다.


 "둘이 교복 맞추러 다녀와. 라이퀴아 기분 잘 풀어주고."

 "좀 억울하네요. 같이 했는데."


 하하- 선생님은 상쾌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네가 형이니까 편한거지. 선생님이 이슬레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올려다 봐야 했던 눈높이가 어느새 비슷하거나 조금 내려다봐야 할 정도로 자랐다. 선생님은 라이퀴아에게 했던 것 처럼 이슬레이의 몸도 끌어안았다. 동생 잘 돌보고. 제 귓가에 속삭여지는 말에 이슬레이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동생. 이슬레이는 그 단어를 한번 곱씹었다. 괜히 입안의 치열을 혀로 훑었다. 선생님은 이슬레이의 대답이 들리지 않는 것에 아무런 의구심도 품지 않았다. 라이퀴아, 선생님 간다- 라이퀴아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마중을 나왔다. 선생님은 여상스럽게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토라진 채 마중하기에는 이번 출장은 며칠이 걸렸다. 라이퀴아는 선생님의 품으로 안겼다. 다녀오세요. 선생님의 입술이 라이퀴아의 관자놀이에 닿았다 떨어졌고, 이번에 라이퀴아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마른 팔이 선생님의 목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앞으로 자랄테니 조금 크게 사는게 좋아요. 종업원은 유난히도 사근사근하게 말하며 이슬레이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라이퀴아는 측은함을 가득 담은 얼굴로 종업원을 바라봤다. 이슬레이는 종업원의 말에 적당히 대꾸하며 딱 맞는 교복의 치수를 확인했다. 그냥 형 입던거 물려입어도 되는거 아냐? 종업원이 한 치수 큰 옷을 가지러 간 사이 라이퀴아가 이슬레이의 귓가에 속삭였고 이슬레이는 어림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괜히 오기가 붙은 라이퀴아가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한 치수 큰 사이즈를 고르고도 라이퀴아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저녁은 라이퀴아를 달래기 위해 라이퀴아가 메뉴를 정했다. 라이퀴아는 식사보다도 달달한 간식에 관심이 많았다. 후식이 딸려오는 패밀리 레스토랑을 고를 것을 이슬레이는 일찌감치 눈치채고 있었다. 라이퀴아는 자연스럽게 메뉴판의 디저트 코너를 펼쳤고, 이슬레이는 그것을 몇 페이지 앞으로 넘겼다. 라이퀴아는 필라프와 파스타를 각각 하나씩 두고 고민했고, 두 개를 모두 시켰다. 라이퀴아는 한껏 불쌍하고 귀여워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메뉴판 하단의 레몬에이드도 짚었지만 이슬레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디저트도 먹을거잖아, 자꾸 단것만 먹으면 안돼. 이슬레이가 살짝 라이퀴아의 코를 꼬집었다. 이럴때만 선생님 흉내야, 라이퀴아가 코맹맹이 소리로 불만을 터트렸다. 테이블 앞에 서 있던 웨이트리스는 몰래 웃으며 주문을 받아적었다. 식당 안에는 손님이 그리 많지 않았던 탓인지 요리는 빠르게 나왔다. 이슬레이는 먼저 라이퀴아의 앞접시에 음식을 덜어줬다. 라이퀴아는 예의 바르게 잘먹겠습니다- 하는 인사를 하고는 포크를 들었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가 충분히 음식물을 섭취할 때 까지 기다렸다. 딱히 입맛이 없었고, 밖에서 하는 식사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몇번 먹는 시늉을 하다 손을 뗀 채 라이퀴아의 식사만 구경하고 있었다.


 너한테는 먼저 말해야 할 거 같아서 그러는데. 이슬레이의가 턱을 괸 채 무덤덤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나 곧 나갈거야."


 이슬레이의 말에 라이퀴아가 분주하게 움직이던 턱을 멈췄다. 라이퀴아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스푼 끝이 그릇을 긁고, 라이퀴아는 겨우 입안의 음식물을 삼켰다. 이슬레이의 최대 이해자는 선생님이 아닌 라이퀴아였다. 두 사람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단순한 몸짓으로 서로의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 처럼,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말 속에 숨은 의미를 알아차렸다. 이슬레이는 집이 아닌 '가족'을 나가려 하고 있었다. 이슬레이와 라이퀴아는 의심이 많았고, 자신에게 쏟아지는 호의에도 한발짝 물러나는 아이들이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이유 없는 온기를 받을 때면 부담만 커질 뿐이었다.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생각을 이해했다. 정확한 생각을 모두 꿰뚫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슬레이의 부채감은 이해하고 있었다. 라이퀴아는 대꾸 없이 스푼 끝을 씹었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손을 잡아끌어 스푼을 잘근거리지 못하게 하고, 입가를 한번 닦아줬다. 손가락에 스친 입술은 부드러웠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입술이 닿은 손가락을 매만지지 않기 위해 의식하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라이퀴아는 그대로 스푼을 내려놨다. 디저트 시킬까? 이슬레이의 물음에 라이퀴아는 고개를 저었다. 집에 갈래.


 식당을 빠져나온 라이퀴아는 조금 느리게 걸으며 이슬레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보폭이 차이나는 탓에 라이퀴아가 조금 속도를 늦춘 것 만으로도 거리는 금방 멀어졌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라이퀴아는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 형- 이라고 자꾸만 튀어나오려는 목소리를 안으로 삼켰다. 라이퀴아는 부르지 않았지만 이슬레이는 얼마 걷지 않아 뒤를 돌아봤다. 지는 노을 탓에 이슬레이의 몸 가장자리로 붉은 선이 생겼다. 풍경과의 괴리를 만들며 이슬레이가 라이퀴아에게 다시 다가왔다.


 "형, 나 발목 아픈거 같아."


 라이퀴아는 자신의 통증인데도 애매하게 흐리는 말투를 썼다. 이슬레이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라이퀴아의 앞에 한 쪽 다리를 꿇고 몸을 숙였다. 오히려 놀라 움찔하는 라이퀴아의 다리를 붙잡는다. 운동화를 벗기고 바지자락을 걷어올렸다. 라이퀴아의 발목은 거의 한 줌이었다. 멍도 부어오른 기미도 없었지만 가느다란 발목이 움찔움찔 떨리고 있었다. 사다리에서 뛰어내리지 말라니까. 이슬레이가 라이퀴아의 발목을 문지르며 잔소리했다. 라이퀴아는 제 앞에 보이는 이슬레이의 어깨에 손을 기댔다. 안 나가면 안돼? 라이퀴아가 반쯤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라이퀴아도 선생님처럼 가족을 원하고 있었다. 이슬레이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슬레이는 부드러운 손길로 라이퀴아에게 다시 신발을 신겨줬다. 무릎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는 몸을 일으킨다.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얼굴을 마주보지 못하고 제 발끝만 노려봤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마른 등을 어루만졌다. 라이퀴아, 너는 날 이해해 줄 거지? 그 말에 라이퀴아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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