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퀴아가 잠든 후에도 선생님은 한참동안이나 잠들지 못했다. 제 몸에 기대 자는 작은 아이가 혹여 불편할까- 아픔을 참지는 않을까- 불안해했다. 이슬레이가 어린 시절 열에 앓다 눈을 떴을 때면 꼭 보이던 그 얼굴이었다. 이슬레이에게는 들어가서 자라는 말을 하면서 본인은 연신 라이퀴아의 가슴을 토닥이고 있었다. 선생님의 눈은 반쯤 감겨있었다. 걱정에 억지로 졸음을 몰아내다가도 푹 고개가 꺾이고, 그것에 놀라 깨고 다시 고개가 꺾이기를 반복한다. 이슬레이는 그런 선생님을 보고 방에 들어가기는 커녕 이불을 들고 나왔다. 이불을 아이의 몸 위로 덮어주자 선생님이 부드럽게 웃었다.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착하네, 라는 한마디를 겨우 하고는 스르르 몸이 기울어진다. 선생님은 잠이 많은 편이었다. 한번 잠들면 쉽게 깨지 않는 편이기도 했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에게 덮어줬던 이불 한 귀퉁이를 끌어 선생님의 몸 위까지 덮었다.


 또 혼자 깨면 곤란하니까, 이슬레이는 아무도 듣지 않을 핑계를 중얼거리고는 잠든 라이퀴아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공연히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어 라이퀴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라이퀴아의 얼굴 근육이 움찔거리는 것에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라이퀴아가 부드럽게 풀어진 얼굴로 웃으며 이슬레이의 손에 머리를 부볐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머리를 헝크러트리듯 한번 매만지고는 손을 떼어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잠들 수 없었다. 열이 나는 걸까, 라이퀴아에게 닿았던 손이 홧홧했다. 열이 오른 손을 쥐었다피며 이슬레이는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선생님과 라이퀴아는 맞춘듯이 일정한 박자로 호흡했고, 이슬레이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가장 먼저 아침을 맞이한 것은 라이퀴아였다. 잘 뜨이지 않는 눈을 문질러가며 몸을 일으킨다. 거실 바닥에 헤어 드라이어는 콘센트만 뽑힌 채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고, 젖은 수건은 소파에 대충 걸쳐 있었다. 선생님은 라이퀴아의 옆에 모로 누워 있었고, 이슬레이는 소파에 머리를 기대앉은 자세였다. 이슬레이는 이불도 없이 자고 있었고, 라이퀴아와 선생님이 함께 이불 하나를 나눠 쓰고 있었다. 주변을 보아하니 라이퀴아기 지난 밤 까무룩 잠든 이후 모두 거실에서 잠든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7시 24분. 라이퀴아는 멍한 머리로 오늘이 주말인 것을 기억해냈다. 선생님은 주말을 가리지 않고 바쁜 편이었지만- 라이퀴아는 선생님을 깨워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했다. 라이퀴아는 잠든 선생님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감긴 눈꺼풀이 움찔 떨리고, 눈이 마주쳤다. 선생님은 라이퀴아의 얼굴을 한번 확인하더니 그대로 라이퀴아의 몸을 감싸 끌어안았다. 더 자렴, 선생님은 다시 눈을 감고 속삭였다. 목소리에서는 졸음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라이퀴아는 눈치를 보다 선생님 쪽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라이퀴아의 등을 완전히 감싸안은 팔이 도닥도닥 기분 좋은 리듬을 만들었다. 졸리지 않다, 는 생각과 달리 따뜻한 체온과 도닥거림에 하품이 튀어나왔다.


 라이퀴아는 자신이 잠드는 것도 모르고 다시 잠에 빠졌다. 새벽 내내 난리를 쳤으니, 활동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색색 숨을 고르는 소리만 거실에 가득했다. 비스듬하게 떠오른 해가 창문을 통과하며 길게 볕의 길을 만들었다. 햇빛이 발치를 간지르고, 창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누워있던 선생님이 눈을 떴다. 선생님은 제 품 안에서 색색 숨을 고르는 라이퀴아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라이퀴아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팔을 빼내고 일어나, 불편해보이는 자세로 자고 있는 이슬레이의 어깨를 흔들었다. 지난 새벽, 라이퀴아를 재운 이후의 기억이 없는 것을 보니- 이불은 이슬레이가 꺼낸 것이 분명했다. 이슬레이의 미간이 좁아지고 가느다란 주름이 잡혔다. 누워서 자야지, 선생님의 말에 잠이 덜 깬 이슬레이는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미끄러지듯 몸을 움직였다. 선생님은 이불을 잘 정리해 아이들을 덮었다.


 "역시 닮았다니까..."


 이슬레이와 라이퀴아는 곡옥처럼 몸을 웅크리고, 등을 마주 대하고 있었다. 사이 좋게 얼굴이라도 마주보고 자면 좋을텐데. 고분고분한 듯 하면서도 자기 주장이 뚜렷한 점 까지 닮은걸까. 그 모습이 아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 웃음이 새었다. 흐뭇한 얼굴로 선생님이 아이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아이들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이슬레이도 라이퀴아도 날 너무 좋아한다니까. 아, 하고 뭔가 생각난 듯 선생님이 방으로 들어가 핸드폰을 가져왔다. 등을 맞댄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홈화면으로 등록한다. 둘이 안다면 불만스러워 하겠지만 억지로 사진을 지우지도 않을 것이다. 선생님에게도 둘은 유난히 아픈 손가락이었다. 일단 좀 더 자게 둘까, 성장기의 아이들은 충분히 자야지.


 칫솔에 치약을 눌러짠다. 느긋한 움직임으로 칫솔을 입에 물고 아직 열려있는 환기창을 닫았다. 선생님은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을 치약의 맛이 신경쓰였다. 어린이용 치약이 필요할까, 5학년이면 필요 없나. 하지만 라이퀴아 매운거 싫어하기도 하고- 선생님의 최초의 육아는 중학생 이슬레이와 함께 였다. 초등학생과 중학생. 시기적으로는 비슷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전적으로 어른의 기준이었다. 이슬레이도 해가 다르게 성장했고, 심지어 꽤나 어른인 척 하는 아이에 속했다. 그러고보니 그런 점도 닮았네. 선생님은 칫솔질을 하던 손을 멈추고 큭큭 웃었다. 이슬레이는 키도 빨리 자란 편이었지만, 라이퀴아는 또래보다 두어살은 어리게 보일 정도로 작았다. 세면대는 쓰기 불편하지 않으려나. 수납장은 너무 높지 않을까. 옷도 사야겠지. 잠옷은 귀여운 걸로 사줘야겠다. 이슬레이 만큼이나 빨리 자라려나. 오래 어리광 부려도 좋을텐데.





 이슬레이와 라이퀴아가 깬 것은 선생님이 씻고 나와 부엌을 뒤질 때 였다. 선생님의 계획으로는 아이들을 더 재우고, 아침 겸 점심을 준비한 후 느즈막하게 깨울 생각이었지만- 성실하기 짝이 없는 아이들은 그 전에 깨버렸다. 이슬레이는 일어나자마자 씻으러 들어갔다. 밥으로 뭐가 좋은지 고민하느라 냉장고를 열중해 뒤지고 있던 선생님은 물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누군가 깬 것을 알아차렸다. 라이퀴아는 뭉그적거리는 움직임으로 제 옆을 몇번 짚었다. 손에 아무것도 닿는게 없자 라이퀴아의 인상이 한껏 찌푸린 채 주변을 둘러봤다. 멍한 머리로 선생님도, 그리고 또 다른 동거인도 없는 것을 알아차린 라이퀴아는 놀란 토끼눈을 하며 허둥지둥 일어났다. 부엌과 거실이 이어진 구조의 집이었기에 라이퀴아는 금방 선생님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선생님의 얼굴을 확인한 것 만으로도 아이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가느다란 발목에 긴 바지가 자꾸 채여 불편할만도 했건만, 라이퀴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선생님에게 다가갔다. 기어코 발 아래까지 흘러내린 옷자락을 밟고 몸이 기울었다.


 "아침 인사야?"


 폭, 제 품안에 안긴 라이퀴아를 보며 선생님이 물었다. 라이퀴아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두 팔이 그대로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라이퀴아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라이퀴아는 선생님을 올려다봤다. 선생님 기뻐보여. 라이퀴아는 선생님을 따라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라이퀴아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발 끝이 살짝 뜰 정도로 강하게 안긴 라이퀴아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뭐하세요?"


 둥실둥실 들뜬 두 사람을 본 이슬레이가 물었다. 이슬레이는 일어난지 얼마 안 된 사람 답지 않았다. 미형의 얼굴은 약간 피곤한 기색이 돌았지만 여전히 말끔했고, 물기가 살짝 남아있는 머리카락은 눌린 자국 없이 단정했다. 이슬레이도 할래? 선생님이 한 팔로는 여전히 라이퀴아를 끌어안은 채 다른 한 팔을 벌렸다. 선생님에게는 방긋방긋 잘도 웃던 라이퀴아가 경계하는 얼굴로 이슬레이를 바라봤다. 이슬레이가 거절하자, 안도한 얼굴이 한숨을 내쉰다. 너무 노골적인데. 아직 숨길 줄을 모르는 건가. 이슬레이의 거절에 선생님은 크게 신경쓰지도 않고 그대로 다시 라이퀴아를 안았다. 오히려 거절한 이슬레이만 찝찝해진 채 입을 삐죽였다. 씻고 와. 선생님의 말에 라이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에게 아침 인사도 하지 않고 욕실로 들어가버렸다.


 라이퀴아가 씻으러 들어간 동안 이슬레이는 거실을 치웠다. 헤어 드라이어의 선을 꼼꼼하게 감고, 이불을 개켜 방에 가져다두고, 소파 위를 뒹구는 수건을 거둬 세탁물함에 가져다 놓는다. 딱히 힘들 일은 없었지만 밤 동안 소파에 머리를 괴고 잔 탓인지 특정 각도로 움직일때면 목이 뻣뻣하게 당기며 아팠다. 목덜미를 누르며 머리를 좌우로 움직인다. 욕실에서 나온 라이퀴아가 의아한 얼굴로 이슬레이를 바라봤고, 이슬레이는 시치미를 떼며 몸을 곧게 폈다. 아침 겸 점심이 된 식사는 크루통이 올라간 인스턴트 스프였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에게 가식적인 미소를 보이지도, 더 먹겠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라이퀴아는 딱 제가 먹을 만큼을 천천히 먹었다. 선생님은 이슬레이와 라이퀴아의 모습을 곁눈질로 확인하고는 스푼을 들었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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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소리가 들린다. 이슬레이는 눈을 떴다. 창 밖은 아직 어두워 베개 옆을 손으로 더듬어 스마트폰의 화면을 확인한다. 깊은 새벽이었다. 세상을 감싸고 있는 빛도, 소리도 잠잠했다. 발소리는 사락사락 천이 쓸리는 소리와 함께 움직였다. 그것 만으로도 이슬레이는 발소리의 주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슬레이는 오늘 작고 마른 아이에게 중학교 시절 체육복을 빌려줬다. 아이의 체구에 비하면 한참은 큰 옷이었지만 그게 집 안의 가장 작은 옷이었다. 선생님이 바짓단을 세 번 정도 접어 올렸줬지만 워낙 마른 아이였기에 헐렁한 옷자락은 접어올린 무게를 못 이기고 원상태로 돌아왔다. 스위치를 누리는 소리에 이어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린다. 이슬레이는 상체를 일으킨 채 고민했다. 선생님은 주무시고 계신가. 나갈까, 말까. 이슬레이는 아이가 껄끄러웠다. 5학년이면 혼자 뭘 못할 나이는 아니고. 스르륵 기우는 머리가 벽에 닿는다. 찬 기운이 벽에 닿은 이마로부터 몸에 스며들었다. 꽤 긴 시간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을 닫는 소리도, 스위치를 누르는 소리도. 발소리도. 이슬레이는 몸을 일으켰다. 창 밖으로 들리는 자동차 소리만 가까웠다 멀어졌다. 방문을 열고 나오니 화장실 문이 작게 열린 채 주황색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슬레이는 조금 열린 문을 그대로 밀었다. 경첩이 울리는 소리에 놀란 듯 작은 등이 한번 튀어오른다.


 주황빛이 도는 빛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었다. 차가운 타일 바닥에 두 무릎을 붙이고, 한 손은 배를 꾹 누르고 있었다. 벌어진 입으로 힘겹게 숨을 쉬고, 땀에 젖은 옷은 등에 달라붙어 마른 굴곡을 그대로 보였다. 아이는 피곤한 얼굴로 이슬레이를 한번 힐끗 보더니 입안에 모인 침을 변기에 뱉었다. 그러고는 벽을 짚으며 겨우 일어나- 제 입가를 가린 채 고개를 한번 꾸벅 숙이고는 끝이었다. 아파하고, 짜증을 내고, 힘들어 해도- 울거나 도와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성깔 참. 이슬레이의 눈썹이 비뚤게 올라갔다.


 "...선생님은 안 깨셨죠?"


 조금 머뭇거리며 아이가 말했다. 내내 아이답지 않던 얼굴이 '선생님'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때는 제 나이처럼 변했다. 눈썹 끝을 내린 채 눈동자가 흔들린다. 눈 앞에 두고 있는 사람보다도 우선하게 되는 사람. 세상의 모든 것이 그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는 그런 기분.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그것은 이슬레이가 라이퀴아를 불편해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불편함이 창백한 얼굴의 어린애를 버려두게 만들지는 못했다. 자고 있는 선생님을 깨워 난리를 칠 만큼은 아니지만, 도와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다만 집에는 그럴싸한 상비약이 없었다. 선생님과 이슬레이, 두 사람 모두 집보다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었고, 약이 필요하다면 병원에 가는 편이었다. 잠에서 깼을 때 확인한 시간은 오전 3시 48분. 이슬레이는 소매를 걷어올리고 라이퀴아의 등을 툭 밀었다. 도와줄게.


 이슬레이의 손이 라이퀴아의 입 안으로 들어왔다. 작은 혀를 검지로 누르고, 그보다 긴 손가락이 목의 안쪽을 파고든다. 켁, 하고 목에 걸리는 소리와 동시에 아이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이슬레이는 기우는 몸의 허리를 낚아챘다. 우웩, 괴로운 소리를 내며 아이는 제 허리를 받히는 이슬레이의 팔을 끌어안았다. 힘이 풀린 다리는 꺾여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했고, 머리로 피가 쏠려 정신이 아찔했다. 제 풀에 놀란 듯 라이퀴아는 크게 뜬 눈에서 눈물을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듯 으, 으, 하는 소리만 가늘게 새었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가 입을 헹구게 하고는 뒷정리를 시작했다. 물을 내리고, 환기용으로 난 작은 창을 활짝 연다. 라이퀴아는 입을 헹구고, 지친 듯 세면대에 머리를 기댔다. 여전히 우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선생님한테는 비밀이에요. 이슬레이는 그 말에 대답을 피하며 화장실 나서려 했다. 이슬레이가 문고리를 잡기도 전에 열리는 문만 아니었다면.


 "무슨 일이야."

 "...제가 문에 부딪쳤네요."

 "아, 미안. 괜찮니?"


 이슬레이는 얼얼한 이마를 문질렀다. 한뼘이 조금 안되게 열린 문 틈으로 선생님의 얼굴이 보였다. 다른 일은 없는 거지? 바로 핵심을 찔러오는 질문에 이슬레이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곁눈질로 뒤를 보자 라이퀴아가 허둥거리며 제 검지손가락을 입술 앞에 붙이고 있었다. 쉿, 하는 소리에 선생님이 먼저 반응하며 문을 밀었다. 라이퀴아, 너 여기 있어? 이슬레이는 또 문에 부딪치는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한발 뒤로 물러났다. 벌써 냄새가 빠졌을 리 없으니- 화장실 안으로 들어온 선생님은 눈치챈 듯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거짓말을 한다고 속을 사람도 아닐 뿐더러, 이슬레이이게 라이퀴아의 비밀을 지켜줄 의리는 없었다.


 "쟤 체했나봐요. 얼굴 하얗게 질려서 다 죽어가던데."

 "뭐?"

 "?!"


 그렇게나 사람을 못 믿는다는 얼굴을 해 놓고는,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은 제법 재미있었다. 라이퀴아는 입을 벌린 채 이슬레이를 바라봤다. 무엇인가 말을 할 듯 말 듯 입술이 벙긋거린다. 라이퀴아, 선생님의 부름에 아이의 어깨가 튀었다. 선생님은 라이퀴아를 살피느라 이슬레이에게 뒷모습 만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 표정이 그린 듯이 선했다.


 "일단 토하게 만들었고, 열도 엄청 나ㅅ..."
 "비밀이랬는데!!!!"

 "난 약속 안했다."

 "라이퀴아, 왜 비밀로 하려고 한거야-"


 좁은 화장실에 세명의 목소리가 울리니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큰 목소리 낼 줄 아는구나, 하는 감탄을 속으로 삼키고 이슬레이가 능청스레 대꾸하자 라이퀴아는 분을 참지 못하고 발을 굴렀다. 선생님은 라이퀴아의 손을 잡고 눈을 맞췄다. 라이퀴아는 다정하게 제 이름이 불릴 때 마다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기분 잘 알지. 라이퀴아가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입을 크게 벌리고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선생님은 어쩔 줄 몰라하며 라이퀴아의 눈물을 훔쳐내다가,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너를 탓하는게 아니야, 미안해, 선생님이 몰라줘서 미안해. 이슬레이는 그 말이 역효과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예상대로 라이퀴아의 울음소리는 더 커졌다. 





 갈아 입힐 옷이 없다. 아이의 짐에는 약간의 속옷과 외출복 서너개, 그리고 책들이 전부였다. 이슬레이가 겨우 찾아낸 체육복은 이미 라이퀴아의 땀에 흠뻑 젖어 다시 입힐 수 없었다. 별 수 없이 적당한 반팔 라운드 티와 반바지를 챙겼다. 욕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슬레이는 헤어 드라이어와 옷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창백했던 아이의 얼굴에는 혈색이 돌아왔다. 높은 체온에 비누향이 유난히도 강하게 나는 것 같았다. 라이퀴아는 커다란 타월을 몸에 두른 채 선생님의 품에 안겨 있었다. 가늘게 뜬 눈가는 발갛게 짓무르고, 부어있었다. 작은 머리도 가누지 못해 이마가 선생님의 목덜미에 닿고, 머리카락 끝에 맺힌 물방울은 뚝뚝 떨어졌다. 선생님 옷도 꺼내둘까요. 응, 부탁할게. 선생님은 이슬레이에게서 옷을 받고, 능숙하게 라이퀴아를 고쳐 안았다. 옛날 생각나네- 하는 목소리에 마침 선생님의 옷을 들고 나온 이슬레이가 혀를 찼다.


 "저는 저 정도로 미련하지는 않았어요."


 선생님은 소리 없이 웃고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반쯤 졸고 있는 라이퀴아에게 옷을 입혔다. 물이 떨어지는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고, 몸의 물기를 털어낸다. 헐렁한 옷은 입히는 게 수월했지만 그만큼이나 쉽게 흘러내렸다. 상의가 워낙 커 어깨선이 팔뚝의 중간 쯤에 닿았고, 길이는 허벅지를 덮었다. 바지 밑단은 세 번을 접어 올리고도 자꾸 아이의 발에 밟히고, 흘러내렸다. 라이퀴아가 불편한 듯 바짓단을 툭툭 차는 시늉을 했다. 금방 잘거니까 참아, 이슬레이가 라이퀴아의 머리를 감싼 수건을 풀며 말했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수건을 치워두고 보송한 수건으로 부드럽게 머리를 매만진다. 따뜻한 바람이 라이퀴아의 얼굴에 닿았다. 헤어 드라이어의 소음 속에서도 아이는 꾸벅꾸벅 졸았다. 선생님은 라이퀴아의 몸이 뒤로 넘어가지 않게 제 몸에 기대게 만들었다. 이 시간에 그거 써도 되나? 깰 사람은 얘 울 때 깼을걸요. 나직한 목소리들이 부드럽게 오가는 것을 들으며 라이퀴아는 제 눈을 부볐다. 바람도, 선생님의 체온도, 오가는 목소리도 따뜻했다. 토닥토닥 일정한 리듬이 라이퀴아의 몸을 두드렸고, 라이퀴아는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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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걸 씁니다. 라이퀴아른. 육아물과 아침드라마를 적당히 섞었습니다.

*현대 au, 유료분네타캐릭터 + 이슬레이 + 라이퀴아가 가족이 됩니다. 유사 근친 요소 주의, 주요 인물부터 네타 주의. 나이 조작 있습니다.




 돌아온 집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이슬레이는 팔에 걸고있던 장바구니를 현관 안쪽으로 밀어넣고 문을 닫았다. 신발을 벗고, 책가방을 방문 앞에 기대둔다. 이슬레이는 거실에 불을 켜고 베란다 문을 열어 환기시킨 뒤 부엌으로 향했다. 교복 마이를 의자 등받이에 걸쳐두고 셔츠 소매를 걷어올린다. 냉장고에 넣어야 할 것, 오늘 쓸 것을 분류하고 싱크대 안을 확인한다. 하지 마시라니까, 방금 설거지를 끝낸 듯 안쪽이 젖은 채 텅 빈 싱크대에 이슬레이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집안일은 대부분 그의 몫이었다. 이슬레이를 맡아주고 있는 사람은 바쁜 편이었고, 갑작스레 얹혀 살게 된 이슬레이로서는 집안일을 스스로 하는 것이 더 편했다. 이슬레이는 그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를 가족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 사람은 좋은 스승이었고, 항상 부드럽게 웃고, 바쁜 와중에도 이슬레이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가족으로 여길만큼 소중한 사람이었기에 묘한 죄책감과 불안이 이슬레이의 신경을 긁었다. 이슬레이는 조금이라도 더 선생님에게 쓸모가 있고 싶었다. 그렇게 얘기하면, 할 수 있는 건 나눠서 하면 돼- 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대꾸할 뿐이었다. 사람을 쓰자는 얘기도 나왔었지만, 자기 공간을 소중히 여기는 이슬레이로서는 타인이 영 탐탁치 않은 선택지였다. 선생님은 '돈 아까워요' 라는 대답은 들은 척도 안하더니 '집에 남이 들어오는게 싫다'는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살펴본 세탁물은 이미 건조대 위에 있었다. 곱개 갠 빨래들이 거실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것 까지 확인한 이슬레이는 자기몫의 옷과, 벗어둔 마이를 가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앞에 덩그러니 놓인 가방을 책상 위로 던져두면, 두꺼운 참고서가 둔탁한 소리를 냈다. 교복을 갈아 입고 나와 시간을 확인하니 시계의 짧은 바늘이 5와 6의 가운데를 지나고 있었다. 밥을 먹고 들어올 때면 항상 연락이 있었다. 아직 연락이 없는걸 보면 곧 돌아올 것이다. 이슬레이의 기다림을 눈치라도 챈 것처럼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이제 들어갈게, 6시 쯤에는 도착할…>


 제법 긴 내용인지 팝업으로 뜬 메시지 창에는 말 줄임표가 달려 있었지만 그 내용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했다. 이슬레이는 굳이 이어지는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 화면을 껐다. 이제 제법 쌀쌀해진 집안에 열어둔 창문을 닫는다. 낮은 온도로 난방을 틀고 부엌으로 향한다. 선생님도 이슬레이도 요리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못 하지도 않았다. 대충, 감으로, 그리고 인스턴트를 적극 활용하는 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이었다. 이슬레이는 소매를 걷고 냉장고를 열었다. 기억으로는 개봉한지 한참인 파스타 소스가 종류별로 냉장고 한칸을 차지하고 있었다. 날짜를 확인해보니 아슬아슬하게 먹을 수 있다. 양파, 베이컨, 버섯에 마늘 그리고- 이슬레이는 기억을 더듬어 재료를 꺼내고 손질했다. 잘게 썬 양파를 볶다 투명해지면 잡다한 야채와 베이컨을 넣는다. 기름이 조금 부족한가 싶지만, 베이컨이 어떻게든 해 줄 것이다. 버터를 큼직하게 잘라 넣으면 순식간에 향이 올라왔다. 붉은 소스들을 깔끔하게 긁어가며 넣고 빈 병은 물을 흘려 씻었다. 눈대중으로 우유를 넣고, 시간을 확인하니 타이밍 좋게 도어락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슬레이, 나 왔어- 맛있는 냄새."

 "오셨ㅇ..."


 이슬레이는 가스레인지 불을 줄이고 부엌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맞이하는 인사가 나오다 말고 끊겼다. 선생님의 한 손에 커다란 백팩이 들려 있었고, 다른 한 쪽에는 작고 마른 손을 잡고 있었다. 이슬레이는 입꼬리를 조금 끌어내린 채 선생님을 바라봤다. 이슬레이의 표정에 선생님은 당황한 듯 메세지 못봤니? 라고 물었다. 초등학교 3학년 쯤 됐을까, 작고 마른 아이였다. 검은 곱슬머리가 눈가를 답답하게 가리고, 그 사이로 보이는 눈에는 경계가 가득했다. 잡은 손은 놓지 않은 채 선생님의 뒤로 몸을 숨겼다. 턱을 조금 안으로 끌어당겨 제 표정은 가리면서도 이슬레이를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었다. 이슬레이는 '집에 남이 들어오는게 싫다' 고 말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다면 별 수 없지, 라고 했다. 그리고 오늘 남이 들어왔다. 이슬레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릇 세개 준비하면 되는거죠? 태연을 가장하는 목소리에는 화가 섞여 있었다.




 침묵뿐인 식사시간이었다. 원래 식사를 하며 떠드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보다도 훨씬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선생님은 어떻게든 분위기를 띄워보려 몇가지 화제를 던졌지만 이슬레이의 글쎄요, 모르겠어요, 그래요- 따위의 단답에 모든 화제가 차단됐다. 아이는 그런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열심히 제 몫의 음식을 먹어치웠다. 계란은 조금씩 스프와 섞어 먹어치우고, 구운 빵에 건더기를 잔뜩 올려 열심히도 먹었다. 통통한 뺨이 부풀어오르도록 음식을 가득 물면서도, 소리 없이 오물오물 씹어 삼킨다. 속이 든든해지자 잔뜩 굳어 경계하던 얼굴이 느슨하게 풀리고, 뺨에 생기가 돌았다. 선생님은 그런 아이의 얼굴을 흐뭇하게 보다, 이슬레이 쪽을 힐끔 보고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더 먹을래?"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에게 미소지으며 물었다. 철저한 대외용 얼굴에 선생님은 역시나, 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여서 제 몫을 더 받고 분주히 숟가락을 움직였다. 너무 급하게 먹는 듯한 모습에 선생님이 아이의 입가를 닦아주며 나무랐다. 2인분을 기준으로 만든 것을 셋이 나눈 것은 평소에 비해 터무니 없이 적은 양이었지만, 이슬레이도 선생님도 더 먹을 상태가 아니었다. 라이퀴아, 선생님은 형이랑 얘기하고 올게. 선생님이 웃으며 라이퀴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라이퀴아는 숟가락을 입에 문 채 선생님과 이슬레이를 번갈에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 먹은 그릇은 그냥 둬, 이슬레이는 마지막까지 사근사근 얘기하며 먼저 일어난 선생님의 뒤를 따라 나갔다.


 아이, 라이퀴아는 순식간에 혼자 남은 공간에 그제서야 몸의 힘을 풀었다. 둥근 어깨가 축 늘어지고 눈썹 끝이 애처롭게 내려갔다. 음식이 든 그릇 바닥을 긁다 겨우 한 숟가락을 더 뜬다. 배가 부른 것은 한참 전이었지만, 무거운 분위기에 할 수 있는게 없어 반복적으로 음식을 입에 밀어넣고 있을 뿐이었다. 이 집도 안되려나, 라이퀴아는 자신을 처음 본- 이슬레이라고 불린 남자의 표정이 순간 구겨졌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집 저집을 옮겨다니는 생활로 몸에 밴 눈치는 그 순간의 악의를 알아차렸다. 다시 언제 먹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라이퀴아는 음식을 남기지 않고 먹으려 애썼다. 꽉 찬 배가 살살 아파오기 시작했다.




 단 둘이 되자마자 싸늘하게 굳은 이슬레이의 표정에 선생님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쟤 뭐에요. 라이퀴아, 초등학교 5학년이고. 그걸 물어보는게 아니잖아요. 이제 함께 살 가족.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선생님의 말에 이슬레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한테는 남이에요, 라고 기분대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이슬레이 본인도 거둬진 입장이었고, 차이는 오직 순서 뿐이었다. 본인도 그것을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은 오랜 콤플렉스였다. 이슬레이는 모양 좋은 입술을 잘근거리다 제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헝크러트렸다.


 "돌보는건 어떻게 하시려고요."

 "늘 하던대로- 할 수 있는 건 나눠서, 힘든 건 도움을 받아서. 일도 줄일거야."

 "...뜻대로 하세요."


 이슬레이는 한껏 싫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선생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강하게 쥔 주먹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러면 안돼, 선생님의 손이 이슬레이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우리가 가족이 될꺼니까, 너도 라이퀴아도 납득했으면 좋겠어. 이슬레이는 선생님의 다정함이 그 순간만큼은 너무도 싫었다. 열등감이 제 속을 들쑤셔놨다. 라이퀴아라는 아이를 볼 때면 더 그랬다. 자신은 선생님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라이퀴아는 못난 자신과 닮아있었다. 비쩍 마른 몸, 불쌍하기 짝이 없는 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양 떨지 않고, 경계심이 가득한 얼굴로 사람을 관찰하는 것 까지. 이슬레이는 라이퀴아가 불쌍했다. 하지만 선생님도 그런 이유로 자신을 데려왔다 생각하면 비참함을 참을 수 없었다. 자존심은 오래도록 이슬레이를 지탱하는 것이었다. 악문 이가 으드득 갈리는 소리를 냈다.

 제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내일 얘기하자, 고 속삭이는 스승님에게 고개를 끄덕인 것은 이슬레이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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