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험생의 공부 핑계와 어린 아이의 거북한 표정도 통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다 같이 장을 보러가자는 말에 이슬레이와 라이퀴아는 싫은 기색을 내비쳤으나- 선생님의 시무룩한 표정에 입술을 꾹 깨물고 옷을 갈아입을 뿐이었다. 라이퀴아는 먼저 옷을 갈아입고 나와 선생님의 손을 잡았다. 살갑게 제게 다가오는 라이퀴아의 모습에 선생님은 부드럽게 웃었다. 조심스럽게 손가락 끝만 닿은 손을 잡아당겼다. 작고 마른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고, 선생님은 라이퀴아의 엉덩이를 받쳐 안았다. 라이퀴아는 제 손을 어디에 둘지 모르고 허둥대다 겨우 선생님의 어깨를 잡았다. 따라 나온 이슬레이가 뒤로 쏠린 라이퀴아의 등을 밀었다. 그제서야 라이퀴아는 비교적 자연스러운 자세로 선생님의 상체에 몸을 기댔다. 이슬레이는 마지막으로 문단속을 하고 조금 앞서 걸었다.


 "안고 내려가시게요?"

 "주차장까지만~"


 라이퀴아는 민망한 듯 귓바퀴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주 잠깐 바둥거리긴 했지만 선생님이 엄살을 부리며 아파하자 잔뜩 겁먹은 토끼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이슬레이가 뒷좌석의 문을 열자 그제서야 선생님은 라이퀴아를 내려놨다. 라이퀴아는 달아나듯 차에 올라탔다. 조수석에는 잡동사니가 쌓여있었고,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옆에 앉았다. 이슬레이가 라이퀴아의 안전벨트를 매 주기 위해 다가가자 라이퀴아가 움찔 놀라며 몸을 좌석에 딱 붙였다. 뭘 자꾸 놀라, 능청스러운 이슬레이의 태도에 라이퀴아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슬레이가 상냥했다. 선생님은 이슬레이에게 라이퀴아를 맡기고는 주차할 공간을 찾아 다시 차를 몰았다. 1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합류하기로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들은 먼저 차에서 내렸다. 이슬레이는 차 문을 잡아주고, 라이퀴아를 차도 반대쪽에 걷게 했으며, 턱이 있는 곳마다 나긋한 목소리로 조심하라 말했고, 꽤 다정한 태도로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런 태도와 반대로 라이퀴아는 점점 표정이 일그러졌다. 반듯하게 생긴 얼굴이 라이퀴아를 내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휠 때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주말이라 그런지 대형마트의 안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나란히 손을 잡고 서 있는 이슬레이와 라이퀴아를 몇몇 사람들이 돌아봤다. 대부분은 이슬레이의 얼굴을 향했고, 라이퀴아는 그것을 이해했다. 다만 머리로 이해한 것과 달리- 라이퀴아에게 그린 듯 한 이슬레이의 미소는 단단히 자신을 체하게 만든 저녁식사를 떠올리게 만들 뿐이었다. 이슬레이에게 잡혀있을 뿐인 손에 힘이 들어갔다. 라이퀴아가 이슬레이의 손을 두어번 잡아 당기자, 이슬레이는 무릎을 반쯤 굽혀 라이퀴아에게 머리를 기울였다. 형이 상냥하네, 넉살 좋은 어르신이 지나가며 웃었고 라이퀴아는 어색하게- 이슬레이는 풋풋하게 웃었다.


 대체 왜 그래요? 라이퀴아는 안 그래도 작은 목소리를 한껏 낮춰 속삭였다. 이슬레이는 그런 라이퀴아를 지긋이 바라보다니 핫, 하고 터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이슬레이의 눈썹이 위로 올라가며 가늘게 선이 생겼다. 상냥함과는 거리가 먼 표정이었지만 라이퀴아는 그 표정을 보는 것이 훨씬 편했다. 라이퀴아가 한 행동을 흉내내 이슬레이가 라이퀴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래야 내가 더 착하게 보일거 아냐. 라이퀴아는 입을 다물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이슬레이를 바라봤다. 딱 벌어진 입을 이슬레이가 닫아줬다.


 "선생님은 남들 입에 오르내리기 쉬운 사람이거든."


 내가 이야기를 보탤 필요는 없지.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말을 모두 이해한 것은 아니었만, '선생님'이라는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슬레이의 작은 움직임에도 움찔움찔 놀라던 라이퀴아가 먼저 이슬레이의 손을 잡았다. 이슬레이는 연신 입꼬리를 끌어 올리던 것을 멈추고, 작은 손을 맞잡았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없이 선생님이 오기를 기다렸다. 선생님이 쇼핑카트를 끌고 나타나자 라이퀴아는 바로 선생님에게 달려갔다. 이슬레이의 손은 여전히 라이퀴아에게 꽉 잡힌 상태여서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상체가 기울었다. 놓지 않는구나. 넘어질 뻔 했는데도 드는 생각은 그것 뿐이었다.


 단지 한 사람이 늘었을 뿐이지만 살 물건은 제법 많았다. 욕실 용품과 새로운 식기, 딛고 오르내릴 등받이가 없는 작은 의자. 카트가 점점 라이퀴아를 위한 물품들로 채워졌다. 점점 흥분한 선생님이 침대를 들여놓을까, 방이 하나 더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갈까- 하는 말을 꺼냈을 때, 라이퀴아는 선생님이 산 물건들을 하나하나 선반으로 다시 돌려놨다. 최소한으로 필요한 물품만 남겨두고도 라이퀴아는 불편한 표정이었다. 선생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고, 이슬레이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장난감 코너에서는 라이퀴아가 가지고 싶은게없다고 하자 종류별로 모조리 쓸어담으려는 선생님을 이슬레이가 제지했다. 라이퀴아는 먼저 바삐 발을 놀려 장난감 코너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적어도 옷은 사자."


 선생님은 라이퀴아를 뒤에서 낚아채 듯 안아올렸다. 발 끝이 들린 라이퀴아가 고개만 돌려 선생님을 올려다봤다. 응? 제발- 선생님이 재차 라이퀴아의 대답을 재촉하자 그제서야 라이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퀴아는 아동복 코너에서 오래 살피는 것도 없이 가장 가까이에 있던 옷을 집어들었다. 가장 저렴한 가격표가 붙은 바지는 선명한 민트색이었고, 이슬레이는 난폭하게 그것을 뺏어 제자리로 돌려놨다. 그건 아니지. 그나마 제 편을 들어주던 이슬레이가 가차없이 말했다. 몇 번의 갈아입히기 끝에 결국 대부분의 옷을 결정한 것은 이슬레이였고, 라이퀴아가 가격표를 확인하기도 전에 선생님은 카트 안쪽으로 옷을 밀어넣었다. 라이퀴아가 가격을 확인할 수 있었던 건 가장 마지막에 직접 고른 토끼무늬 잠옷 뿐이었다. 배신자. 라이퀴아가 소리없이 입만 벙긋거리며 이슬레이를 비난했다. 이슬레이는 입꼬리를 비틀어올리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세 사람이 집에 도착한 것은 저녁 식사시간이 다 되어갈 쯤이었다. 마트를 나오고도 수납장과 접이식 책상, 침대 등을 보기 위해 가구점을 몇군데나 들락거린 탓이었다. 선생님과 이슬레이는 양 손도 모자라 팔과 몸 사이에 끼워야 할 정도로 짐을 한가득 들고 있었고, 라이퀴아가 허둥지둥 집 문을 열었다. 식재료가 담긴 봉지만 바로 부엌을 향했고, 나머지는 거실에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선생님은 줄 끊어진 인형처럼 소파 위로 늘어졌다. 이슬레이도 잠시 벽을 짚고 서서 자신의 어깨를 두드렸다. 냉장고는 새로운 식재료들로 가득 찼지만, 저녁은 배달 음식이었다. 이슬레이는 수납장의 조립설명서를 들여다봤다.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은데- 귀찮은 일을 빨리 해치워버리고 싶은 생각과 피로감을 저울질한다. 이슬레이가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선생님이 거실에 앉아 상자를 뜯기 시작했다. 이슬레이는 자동으로 선생님의 옆에 앉았다. 라이퀴아도 둘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작은 크기의 수납장은 만드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부품을 맞춰 나사를 조이는 것 보다 흔들리지 않게 바짝 끼우는 것이 더 힘들었다. 대강의 모양이 잡히고 타이밍 좋게 벨이 울렸다. 선생님이 음식을 받으러 가고, 이슬레이는 그동안 거실을 치웠다. 부품들을 감싸고 있던 스티로폴과 박스를 분류해 쌓아둔다. 오늘은 뭘 버리는 날이더라, 기억을 더듬고 있자 라이퀴아가 이슬레이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형, 선생님이 밥먹고 같이 치우재."


 라이퀴아가 처음으로 이슬레이를 불렀다. 알게 된 지 겨우 이틀째지만 라이퀴아는 이슬레이를 단 한번도 부른 적이 없었다. 할 말이 있을때면 돌아볼 때 까지 가만히 바라보거나, 저기- 하고 흐린 감탄사로 부를 뿐이었다. 어물어물 말 끝을 흐리는 듯한 존대도 아니었다. 끝이 처진 눈매가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이슬레이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슬레이는 얼떨떨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이 우스워 라이퀴아는 푸스스 바람이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순진하게 풀어진 뺨에 생기가 돌았다. 얘들아, 주방에서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라이퀴아는 먼저 등을 돌려 주방을 향했다. 빨리와, 형. 이슬레이는 어쩐지 그 목소리가, 그 웃음이 귓가를 계속 맴도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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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퀴아가 잠든 후에도 선생님은 한참동안이나 잠들지 못했다. 제 몸에 기대 자는 작은 아이가 혹여 불편할까- 아픔을 참지는 않을까- 불안해했다. 이슬레이가 어린 시절 열에 앓다 눈을 떴을 때면 꼭 보이던 그 얼굴이었다. 이슬레이에게는 들어가서 자라는 말을 하면서 본인은 연신 라이퀴아의 가슴을 토닥이고 있었다. 선생님의 눈은 반쯤 감겨있었다. 걱정에 억지로 졸음을 몰아내다가도 푹 고개가 꺾이고, 그것에 놀라 깨고 다시 고개가 꺾이기를 반복한다. 이슬레이는 그런 선생님을 보고 방에 들어가기는 커녕 이불을 들고 나왔다. 이불을 아이의 몸 위로 덮어주자 선생님이 부드럽게 웃었다.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착하네, 라는 한마디를 겨우 하고는 스르르 몸이 기울어진다. 선생님은 잠이 많은 편이었다. 한번 잠들면 쉽게 깨지 않는 편이기도 했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에게 덮어줬던 이불 한 귀퉁이를 끌어 선생님의 몸 위까지 덮었다.


 또 혼자 깨면 곤란하니까, 이슬레이는 아무도 듣지 않을 핑계를 중얼거리고는 잠든 라이퀴아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공연히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어 라이퀴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라이퀴아의 얼굴 근육이 움찔거리는 것에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라이퀴아가 부드럽게 풀어진 얼굴로 웃으며 이슬레이의 손에 머리를 부볐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머리를 헝크러트리듯 한번 매만지고는 손을 떼어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잠들 수 없었다. 열이 나는 걸까, 라이퀴아에게 닿았던 손이 홧홧했다. 열이 오른 손을 쥐었다피며 이슬레이는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선생님과 라이퀴아는 맞춘듯이 일정한 박자로 호흡했고, 이슬레이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가장 먼저 아침을 맞이한 것은 라이퀴아였다. 잘 뜨이지 않는 눈을 문질러가며 몸을 일으킨다. 거실 바닥에 헤어 드라이어는 콘센트만 뽑힌 채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고, 젖은 수건은 소파에 대충 걸쳐 있었다. 선생님은 라이퀴아의 옆에 모로 누워 있었고, 이슬레이는 소파에 머리를 기대앉은 자세였다. 이슬레이는 이불도 없이 자고 있었고, 라이퀴아와 선생님이 함께 이불 하나를 나눠 쓰고 있었다. 주변을 보아하니 라이퀴아기 지난 밤 까무룩 잠든 이후 모두 거실에서 잠든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7시 24분. 라이퀴아는 멍한 머리로 오늘이 주말인 것을 기억해냈다. 선생님은 주말을 가리지 않고 바쁜 편이었지만- 라이퀴아는 선생님을 깨워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했다. 라이퀴아는 잠든 선생님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감긴 눈꺼풀이 움찔 떨리고, 눈이 마주쳤다. 선생님은 라이퀴아의 얼굴을 한번 확인하더니 그대로 라이퀴아의 몸을 감싸 끌어안았다. 더 자렴, 선생님은 다시 눈을 감고 속삭였다. 목소리에서는 졸음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라이퀴아는 눈치를 보다 선생님 쪽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라이퀴아의 등을 완전히 감싸안은 팔이 도닥도닥 기분 좋은 리듬을 만들었다. 졸리지 않다, 는 생각과 달리 따뜻한 체온과 도닥거림에 하품이 튀어나왔다.


 라이퀴아는 자신이 잠드는 것도 모르고 다시 잠에 빠졌다. 새벽 내내 난리를 쳤으니, 활동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색색 숨을 고르는 소리만 거실에 가득했다. 비스듬하게 떠오른 해가 창문을 통과하며 길게 볕의 길을 만들었다. 햇빛이 발치를 간지르고, 창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누워있던 선생님이 눈을 떴다. 선생님은 제 품 안에서 색색 숨을 고르는 라이퀴아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라이퀴아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팔을 빼내고 일어나, 불편해보이는 자세로 자고 있는 이슬레이의 어깨를 흔들었다. 지난 새벽, 라이퀴아를 재운 이후의 기억이 없는 것을 보니- 이불은 이슬레이가 꺼낸 것이 분명했다. 이슬레이의 미간이 좁아지고 가느다란 주름이 잡혔다. 누워서 자야지, 선생님의 말에 잠이 덜 깬 이슬레이는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미끄러지듯 몸을 움직였다. 선생님은 이불을 잘 정리해 아이들을 덮었다.


 "역시 닮았다니까..."


 이슬레이와 라이퀴아는 곡옥처럼 몸을 웅크리고, 등을 마주 대하고 있었다. 사이 좋게 얼굴이라도 마주보고 자면 좋을텐데. 고분고분한 듯 하면서도 자기 주장이 뚜렷한 점 까지 닮은걸까. 그 모습이 아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 웃음이 새었다. 흐뭇한 얼굴로 선생님이 아이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아이들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이슬레이도 라이퀴아도 날 너무 좋아한다니까. 아, 하고 뭔가 생각난 듯 선생님이 방으로 들어가 핸드폰을 가져왔다. 등을 맞댄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홈화면으로 등록한다. 둘이 안다면 불만스러워 하겠지만 억지로 사진을 지우지도 않을 것이다. 선생님에게도 둘은 유난히 아픈 손가락이었다. 일단 좀 더 자게 둘까, 성장기의 아이들은 충분히 자야지.


 칫솔에 치약을 눌러짠다. 느긋한 움직임으로 칫솔을 입에 물고 아직 열려있는 환기창을 닫았다. 선생님은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을 치약의 맛이 신경쓰였다. 어린이용 치약이 필요할까, 5학년이면 필요 없나. 하지만 라이퀴아 매운거 싫어하기도 하고- 선생님의 최초의 육아는 중학생 이슬레이와 함께 였다. 초등학생과 중학생. 시기적으로는 비슷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전적으로 어른의 기준이었다. 이슬레이도 해가 다르게 성장했고, 심지어 꽤나 어른인 척 하는 아이에 속했다. 그러고보니 그런 점도 닮았네. 선생님은 칫솔질을 하던 손을 멈추고 큭큭 웃었다. 이슬레이는 키도 빨리 자란 편이었지만, 라이퀴아는 또래보다 두어살은 어리게 보일 정도로 작았다. 세면대는 쓰기 불편하지 않으려나. 수납장은 너무 높지 않을까. 옷도 사야겠지. 잠옷은 귀여운 걸로 사줘야겠다. 이슬레이 만큼이나 빨리 자라려나. 오래 어리광 부려도 좋을텐데.





 이슬레이와 라이퀴아가 깬 것은 선생님이 씻고 나와 부엌을 뒤질 때 였다. 선생님의 계획으로는 아이들을 더 재우고, 아침 겸 점심을 준비한 후 느즈막하게 깨울 생각이었지만- 성실하기 짝이 없는 아이들은 그 전에 깨버렸다. 이슬레이는 일어나자마자 씻으러 들어갔다. 밥으로 뭐가 좋은지 고민하느라 냉장고를 열중해 뒤지고 있던 선생님은 물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누군가 깬 것을 알아차렸다. 라이퀴아는 뭉그적거리는 움직임으로 제 옆을 몇번 짚었다. 손에 아무것도 닿는게 없자 라이퀴아의 인상이 한껏 찌푸린 채 주변을 둘러봤다. 멍한 머리로 선생님도, 그리고 또 다른 동거인도 없는 것을 알아차린 라이퀴아는 놀란 토끼눈을 하며 허둥지둥 일어났다. 부엌과 거실이 이어진 구조의 집이었기에 라이퀴아는 금방 선생님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선생님의 얼굴을 확인한 것 만으로도 아이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가느다란 발목에 긴 바지가 자꾸 채여 불편할만도 했건만, 라이퀴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선생님에게 다가갔다. 기어코 발 아래까지 흘러내린 옷자락을 밟고 몸이 기울었다.


 "아침 인사야?"


 폭, 제 품안에 안긴 라이퀴아를 보며 선생님이 물었다. 라이퀴아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두 팔이 그대로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라이퀴아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라이퀴아는 선생님을 올려다봤다. 선생님 기뻐보여. 라이퀴아는 선생님을 따라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라이퀴아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발 끝이 살짝 뜰 정도로 강하게 안긴 라이퀴아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뭐하세요?"


 둥실둥실 들뜬 두 사람을 본 이슬레이가 물었다. 이슬레이는 일어난지 얼마 안 된 사람 답지 않았다. 미형의 얼굴은 약간 피곤한 기색이 돌았지만 여전히 말끔했고, 물기가 살짝 남아있는 머리카락은 눌린 자국 없이 단정했다. 이슬레이도 할래? 선생님이 한 팔로는 여전히 라이퀴아를 끌어안은 채 다른 한 팔을 벌렸다. 선생님에게는 방긋방긋 잘도 웃던 라이퀴아가 경계하는 얼굴로 이슬레이를 바라봤다. 이슬레이가 거절하자, 안도한 얼굴이 한숨을 내쉰다. 너무 노골적인데. 아직 숨길 줄을 모르는 건가. 이슬레이의 거절에 선생님은 크게 신경쓰지도 않고 그대로 다시 라이퀴아를 안았다. 오히려 거절한 이슬레이만 찝찝해진 채 입을 삐죽였다. 씻고 와. 선생님의 말에 라이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에게 아침 인사도 하지 않고 욕실로 들어가버렸다.


 라이퀴아가 씻으러 들어간 동안 이슬레이는 거실을 치웠다. 헤어 드라이어의 선을 꼼꼼하게 감고, 이불을 개켜 방에 가져다두고, 소파 위를 뒹구는 수건을 거둬 세탁물함에 가져다 놓는다. 딱히 힘들 일은 없었지만 밤 동안 소파에 머리를 괴고 잔 탓인지 특정 각도로 움직일때면 목이 뻣뻣하게 당기며 아팠다. 목덜미를 누르며 머리를 좌우로 움직인다. 욕실에서 나온 라이퀴아가 의아한 얼굴로 이슬레이를 바라봤고, 이슬레이는 시치미를 떼며 몸을 곧게 폈다. 아침 겸 점심이 된 식사는 크루통이 올라간 인스턴트 스프였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에게 가식적인 미소를 보이지도, 더 먹겠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라이퀴아는 딱 제가 먹을 만큼을 천천히 먹었다. 선생님은 이슬레이와 라이퀴아의 모습을 곁눈질로 확인하고는 스푼을 들었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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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소리가 들린다. 이슬레이는 눈을 떴다. 창 밖은 아직 어두워 베개 옆을 손으로 더듬어 스마트폰의 화면을 확인한다. 깊은 새벽이었다. 세상을 감싸고 있는 빛도, 소리도 잠잠했다. 발소리는 사락사락 천이 쓸리는 소리와 함께 움직였다. 그것 만으로도 이슬레이는 발소리의 주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슬레이는 오늘 작고 마른 아이에게 중학교 시절 체육복을 빌려줬다. 아이의 체구에 비하면 한참은 큰 옷이었지만 그게 집 안의 가장 작은 옷이었다. 선생님이 바짓단을 세 번 정도 접어 올렸줬지만 워낙 마른 아이였기에 헐렁한 옷자락은 접어올린 무게를 못 이기고 원상태로 돌아왔다. 스위치를 누리는 소리에 이어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린다. 이슬레이는 상체를 일으킨 채 고민했다. 선생님은 주무시고 계신가. 나갈까, 말까. 이슬레이는 아이가 껄끄러웠다. 5학년이면 혼자 뭘 못할 나이는 아니고. 스르륵 기우는 머리가 벽에 닿는다. 찬 기운이 벽에 닿은 이마로부터 몸에 스며들었다. 꽤 긴 시간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을 닫는 소리도, 스위치를 누르는 소리도. 발소리도. 이슬레이는 몸을 일으켰다. 창 밖으로 들리는 자동차 소리만 가까웠다 멀어졌다. 방문을 열고 나오니 화장실 문이 작게 열린 채 주황색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슬레이는 조금 열린 문을 그대로 밀었다. 경첩이 울리는 소리에 놀란 듯 작은 등이 한번 튀어오른다.


 주황빛이 도는 빛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었다. 차가운 타일 바닥에 두 무릎을 붙이고, 한 손은 배를 꾹 누르고 있었다. 벌어진 입으로 힘겹게 숨을 쉬고, 땀에 젖은 옷은 등에 달라붙어 마른 굴곡을 그대로 보였다. 아이는 피곤한 얼굴로 이슬레이를 한번 힐끗 보더니 입안에 모인 침을 변기에 뱉었다. 그러고는 벽을 짚으며 겨우 일어나- 제 입가를 가린 채 고개를 한번 꾸벅 숙이고는 끝이었다. 아파하고, 짜증을 내고, 힘들어 해도- 울거나 도와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성깔 참. 이슬레이의 눈썹이 비뚤게 올라갔다.


 "...선생님은 안 깨셨죠?"


 조금 머뭇거리며 아이가 말했다. 내내 아이답지 않던 얼굴이 '선생님'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때는 제 나이처럼 변했다. 눈썹 끝을 내린 채 눈동자가 흔들린다. 눈 앞에 두고 있는 사람보다도 우선하게 되는 사람. 세상의 모든 것이 그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는 그런 기분.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그것은 이슬레이가 라이퀴아를 불편해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불편함이 창백한 얼굴의 어린애를 버려두게 만들지는 못했다. 자고 있는 선생님을 깨워 난리를 칠 만큼은 아니지만, 도와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다만 집에는 그럴싸한 상비약이 없었다. 선생님과 이슬레이, 두 사람 모두 집보다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었고, 약이 필요하다면 병원에 가는 편이었다. 잠에서 깼을 때 확인한 시간은 오전 3시 48분. 이슬레이는 소매를 걷어올리고 라이퀴아의 등을 툭 밀었다. 도와줄게.


 이슬레이의 손이 라이퀴아의 입 안으로 들어왔다. 작은 혀를 검지로 누르고, 그보다 긴 손가락이 목의 안쪽을 파고든다. 켁, 하고 목에 걸리는 소리와 동시에 아이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이슬레이는 기우는 몸의 허리를 낚아챘다. 우웩, 괴로운 소리를 내며 아이는 제 허리를 받히는 이슬레이의 팔을 끌어안았다. 힘이 풀린 다리는 꺾여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했고, 머리로 피가 쏠려 정신이 아찔했다. 제 풀에 놀란 듯 라이퀴아는 크게 뜬 눈에서 눈물을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듯 으, 으, 하는 소리만 가늘게 새었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가 입을 헹구게 하고는 뒷정리를 시작했다. 물을 내리고, 환기용으로 난 작은 창을 활짝 연다. 라이퀴아는 입을 헹구고, 지친 듯 세면대에 머리를 기댔다. 여전히 우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선생님한테는 비밀이에요. 이슬레이는 그 말에 대답을 피하며 화장실 나서려 했다. 이슬레이가 문고리를 잡기도 전에 열리는 문만 아니었다면.


 "무슨 일이야."

 "...제가 문에 부딪쳤네요."

 "아, 미안. 괜찮니?"


 이슬레이는 얼얼한 이마를 문질렀다. 한뼘이 조금 안되게 열린 문 틈으로 선생님의 얼굴이 보였다. 다른 일은 없는 거지? 바로 핵심을 찔러오는 질문에 이슬레이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곁눈질로 뒤를 보자 라이퀴아가 허둥거리며 제 검지손가락을 입술 앞에 붙이고 있었다. 쉿, 하는 소리에 선생님이 먼저 반응하며 문을 밀었다. 라이퀴아, 너 여기 있어? 이슬레이는 또 문에 부딪치는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한발 뒤로 물러났다. 벌써 냄새가 빠졌을 리 없으니- 화장실 안으로 들어온 선생님은 눈치챈 듯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거짓말을 한다고 속을 사람도 아닐 뿐더러, 이슬레이이게 라이퀴아의 비밀을 지켜줄 의리는 없었다.


 "쟤 체했나봐요. 얼굴 하얗게 질려서 다 죽어가던데."

 "뭐?"

 "?!"


 그렇게나 사람을 못 믿는다는 얼굴을 해 놓고는,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은 제법 재미있었다. 라이퀴아는 입을 벌린 채 이슬레이를 바라봤다. 무엇인가 말을 할 듯 말 듯 입술이 벙긋거린다. 라이퀴아, 선생님의 부름에 아이의 어깨가 튀었다. 선생님은 라이퀴아를 살피느라 이슬레이에게 뒷모습 만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 표정이 그린 듯이 선했다.


 "일단 토하게 만들었고, 열도 엄청 나ㅅ..."
 "비밀이랬는데!!!!"

 "난 약속 안했다."

 "라이퀴아, 왜 비밀로 하려고 한거야-"


 좁은 화장실에 세명의 목소리가 울리니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큰 목소리 낼 줄 아는구나, 하는 감탄을 속으로 삼키고 이슬레이가 능청스레 대꾸하자 라이퀴아는 분을 참지 못하고 발을 굴렀다. 선생님은 라이퀴아의 손을 잡고 눈을 맞췄다. 라이퀴아는 다정하게 제 이름이 불릴 때 마다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기분 잘 알지. 라이퀴아가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입을 크게 벌리고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선생님은 어쩔 줄 몰라하며 라이퀴아의 눈물을 훔쳐내다가,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너를 탓하는게 아니야, 미안해, 선생님이 몰라줘서 미안해. 이슬레이는 그 말이 역효과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예상대로 라이퀴아의 울음소리는 더 커졌다. 





 갈아 입힐 옷이 없다. 아이의 짐에는 약간의 속옷과 외출복 서너개, 그리고 책들이 전부였다. 이슬레이가 겨우 찾아낸 체육복은 이미 라이퀴아의 땀에 흠뻑 젖어 다시 입힐 수 없었다. 별 수 없이 적당한 반팔 라운드 티와 반바지를 챙겼다. 욕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슬레이는 헤어 드라이어와 옷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창백했던 아이의 얼굴에는 혈색이 돌아왔다. 높은 체온에 비누향이 유난히도 강하게 나는 것 같았다. 라이퀴아는 커다란 타월을 몸에 두른 채 선생님의 품에 안겨 있었다. 가늘게 뜬 눈가는 발갛게 짓무르고, 부어있었다. 작은 머리도 가누지 못해 이마가 선생님의 목덜미에 닿고, 머리카락 끝에 맺힌 물방울은 뚝뚝 떨어졌다. 선생님 옷도 꺼내둘까요. 응, 부탁할게. 선생님은 이슬레이에게서 옷을 받고, 능숙하게 라이퀴아를 고쳐 안았다. 옛날 생각나네- 하는 목소리에 마침 선생님의 옷을 들고 나온 이슬레이가 혀를 찼다.


 "저는 저 정도로 미련하지는 않았어요."


 선생님은 소리 없이 웃고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반쯤 졸고 있는 라이퀴아에게 옷을 입혔다. 물이 떨어지는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고, 몸의 물기를 털어낸다. 헐렁한 옷은 입히는 게 수월했지만 그만큼이나 쉽게 흘러내렸다. 상의가 워낙 커 어깨선이 팔뚝의 중간 쯤에 닿았고, 길이는 허벅지를 덮었다. 바지 밑단은 세 번을 접어 올리고도 자꾸 아이의 발에 밟히고, 흘러내렸다. 라이퀴아가 불편한 듯 바짓단을 툭툭 차는 시늉을 했다. 금방 잘거니까 참아, 이슬레이가 라이퀴아의 머리를 감싼 수건을 풀며 말했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수건을 치워두고 보송한 수건으로 부드럽게 머리를 매만진다. 따뜻한 바람이 라이퀴아의 얼굴에 닿았다. 헤어 드라이어의 소음 속에서도 아이는 꾸벅꾸벅 졸았다. 선생님은 라이퀴아의 몸이 뒤로 넘어가지 않게 제 몸에 기대게 만들었다. 이 시간에 그거 써도 되나? 깰 사람은 얘 울 때 깼을걸요. 나직한 목소리들이 부드럽게 오가는 것을 들으며 라이퀴아는 제 눈을 부볐다. 바람도, 선생님의 체온도, 오가는 목소리도 따뜻했다. 토닥토닥 일정한 리듬이 라이퀴아의 몸을 두드렸고, 라이퀴아는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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