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호인이었다. 따뜻했고, 다정했고, 함께 있으면 즐거운 사람이었다. 미련하게도 보일 만큼 부드러운 성정과- 그래도 상관 없을 만큼의 유능함이 있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평생을 굴곡 없이 살아온 인생이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부유하고 평화로운 가정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 어릴 때 부터 영특함을 보였고, 성인이 되어서도 승승장구 하고 있었다. 상냥한 성격 탓에 좋은 이유이든 나쁜 이유이든 주변에 사람이 많이 모였다. 모자란 것이 없었기에 나누는 것을 당연히 여기기도 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누구인가 비꼼을 담아 그렇게 말하기도 했지만 그는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일 뿐이었다. 그는 특별한 사명감이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모든 것에서 초연했고 이상하리만치 교과서적이었다. 그렇기에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동향의 오랜 지인 부부가 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후, 그는 부부의 아이를 받아들이기를 원했다. 부모의 장례식장에서 아이는 정장 대신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 아이의 기억에 그는 몇 번 인사를 나눈 사람일 뿐이었다. 같이 가자, 이슬레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부모의 초상을 끌어안은 아이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동정인가요? 아이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물었다. 피곤함이 서린 뺨에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 아이는 그를 올려다봤다. 상냥한, 그렇기에 속을 알 수 없는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의 대답은…


 이슬레이는 잠에서 깨어났다. 꿈은 미완성인 상태로 끝맺어졌지만 이슬레이는 그 대답을 기억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곱씹은 기억이었다. 그는 이슬레이가 필요하다 말했다. 갈 곳 없는 아이가? 어린 이슬레이는 그 의문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었다. 이용해도 상관없다는 의미였고, 상냥한 미소에 대한 각인이었다. 선생님은 가족을 원했다. 자라나는 이슬레이에게 선생님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들을 줬다. 이슬레이는 벅찰 정도로 쏟아부어지는 애정을 지탱하고자 그를 선생님이라 불렀다. 가족을 원하는 선생님에게는 야속한 일이었지만, 이슬레이는 그 호칭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확인했다. 이슬레이는 선생님의 이유도 이유 없이 쏟는 애정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특별하게 이슬레이가 비정한 성격인 것이 아니라- 타고난 성정이 달랐다. 선생님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호인이었다. 자신이 받는 것들이 모두 빚이 되어 이슬레이의 발목을 잡아 끌었다. 그렇기에 이슬레이는 좋은 아이가 되기 위해 애썼다. 선생님이 원하는 가족을 이루고, 라이퀴아를 동생으로 귀여워해주고 싶었다.


 "형, 아직 자?"


 라이퀴아가 이층침대 난간에 매달려 고개를 내밀었다. 위험하게,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이슬레이가 몸을 세우며 아프지 않게 라이퀴아의 이마에 박치기를 했다. 라이퀴아는 제 이마를 문지르며 아래로 드리웠던 상체를 일으켰다. 이슬레이가 이불을 정리하는 사이 라이퀴아는 사다리의 두어칸을 내려오다 중간즘에서 한꺼번에 뛰어 내려왔다. 발바닥 전체로 무게가 실려 가느다란 발목이 움찔 떨렸다. 그러다 다친다. 이슬레이가 한 손으로 라이퀴아의 두 뺨을 꾹 잡아눌렀다. 라이퀴아는 붕어처럼 입술을 삐죽 내민채 이슬레이를 올려다봤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와 눈을 마주친 뒤 발목을 향해 턱짓했다. 괜찮다는 말 대신 발목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라이퀴아는 메리메리와 레옹이 다니는 중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학교에서 보낸 우편물을 확인한 후 선생님은 옷장을 뒤졌다. 낯익은 블레이저와 바지에 이슬레이는 눈을 깜박였다. 이거 안 버렸어요? 이슬레이의 질문에 선생님이 부드럽게 웃었다. 옛날 생각나지- 이슬레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이 TV를 보고 있는 라이퀴아를 손짓으로 불렀다. 라이퀴아는 쪼르르 다가와서는 두 사람이 찾아낸 것을 확인했다. 라이퀴아가 들어갈 학교의 교복이었다. 이슬레이는 어려서부터 키가 큰 편이었고, 라이퀴아는 또래보다 작았다. 이슬레이가 입었던 교복 블레이저는 셔츠가 아니라 두툼한 맨투맨 위에 입었는데도 품이 남았다. 라이퀴아의 두 팔을 쭉 뻗게 만들자 소매 끝이 헐렁하게 늘어졌다. 바지는 입어볼 것도 없었다. 수선해도 못 입겠네. 선생님이 즐거운 어투로 말했다.


 "우리 막내는 언제 다 크지?"


 선생님은 라이퀴아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라이퀴아는 괴로운 듯 막힌 소리를 내며 고개를 바르작거리기는 했지만 억지로 품을 빠져나오지는 않았다. 장난스럽게 쪽쪽 소리를 내며 선생님의 입술이 라이퀴아의 이마에 기습적으로 닿았다 떨어졌다. 으악, 라이퀴아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비명을 질렀다. 팔락거리는 소매가 선생님의 등을 때렸다. 이슬레이는 소리없이 눈을 반짝이고는 슬쩍 다가섰다. 라이퀴아는 조금 과격한 손짓으로 제 얼굴을 향해 다가오는 이슬레이의 입가를 막았다. 도망치려 해도 등 뒤가 선생님에게 막혀 있었다. 선생님은 여전히 사람좋게 웃으며 라이퀴아도 이슬레이도 돕지 않았다. 이슬레이는 눈가를 가늘게 만들며 라이퀴아를 내려다봤다. 그대로 시선은 라이퀴아에게 고정한 상태로 이슬레이가 고개를 틀었다. 모양이 고운 옆선이 라이퀴아의 손바닥에 파묻혔다. 라이퀴아의 손가락에 축축한 살덩이가 닿았다. 놀란 라이퀴아가 손을 빼냈고, 자신을 막는 손이 사라지자 이슬레이는 얼굴을 바짝 붙여왔다. 그대로 라이퀴아는 코를 깨물리고 말았다. 라이퀴아의 발끝이 이슬레이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라이퀴아는 똑같이 놀림받더라도 선생님에게는 유난히 약했기에 이슬레이는 자신만이 얻어맞을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라이퀴아는 놀리는 재미가 있는 아이였다.


 라이퀴아는 자신이 놀림받은 것을 마음에 오래 담아두는 편이 아니었다. 선생님과 이슬레이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코 주위에 잇자국이 남은 채 사나운 표정으로 TV를 노려보는 라이퀴아를 내버려뒀다. 두 사람의 생각대로 라이퀴아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의 주제가가 두번째로 들릴 때 쯤에는 사나웠던 얼굴이 꽤 풀어져 있었다.


 "둘이 교복 맞추러 다녀와. 라이퀴아 기분 잘 풀어주고."

 "좀 억울하네요. 같이 했는데."


 하하- 선생님은 상쾌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네가 형이니까 편한거지. 선생님이 이슬레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올려다 봐야 했던 눈높이가 어느새 비슷하거나 조금 내려다봐야 할 정도로 자랐다. 선생님은 라이퀴아에게 했던 것 처럼 이슬레이의 몸도 끌어안았다. 동생 잘 돌보고. 제 귓가에 속삭여지는 말에 이슬레이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동생. 이슬레이는 그 단어를 한번 곱씹었다. 괜히 입안의 치열을 혀로 훑었다. 선생님은 이슬레이의 대답이 들리지 않는 것에 아무런 의구심도 품지 않았다. 라이퀴아, 선생님 간다- 라이퀴아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마중을 나왔다. 선생님은 여상스럽게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토라진 채 마중하기에는 이번 출장은 며칠이 걸렸다. 라이퀴아는 선생님의 품으로 안겼다. 다녀오세요. 선생님의 입술이 라이퀴아의 관자놀이에 닿았다 떨어졌고, 이번에 라이퀴아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마른 팔이 선생님의 목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앞으로 자랄테니 조금 크게 사는게 좋아요. 종업원은 유난히도 사근사근하게 말하며 이슬레이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라이퀴아는 측은함을 가득 담은 얼굴로 종업원을 바라봤다. 이슬레이는 종업원의 말에 적당히 대꾸하며 딱 맞는 교복의 치수를 확인했다. 그냥 형 입던거 물려입어도 되는거 아냐? 종업원이 한 치수 큰 옷을 가지러 간 사이 라이퀴아가 이슬레이의 귓가에 속삭였고 이슬레이는 어림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괜히 오기가 붙은 라이퀴아가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한 치수 큰 사이즈를 고르고도 라이퀴아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저녁은 라이퀴아를 달래기 위해 라이퀴아가 메뉴를 정했다. 라이퀴아는 식사보다도 달달한 간식에 관심이 많았다. 후식이 딸려오는 패밀리 레스토랑을 고를 것을 이슬레이는 일찌감치 눈치채고 있었다. 라이퀴아는 자연스럽게 메뉴판의 디저트 코너를 펼쳤고, 이슬레이는 그것을 몇 페이지 앞으로 넘겼다. 라이퀴아는 필라프와 파스타를 각각 하나씩 두고 고민했고, 두 개를 모두 시켰다. 라이퀴아는 한껏 불쌍하고 귀여워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메뉴판 하단의 레몬에이드도 짚었지만 이슬레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디저트도 먹을거잖아, 자꾸 단것만 먹으면 안돼. 이슬레이가 살짝 라이퀴아의 코를 꼬집었다. 이럴때만 선생님 흉내야, 라이퀴아가 코맹맹이 소리로 불만을 터트렸다. 테이블 앞에 서 있던 웨이트리스는 몰래 웃으며 주문을 받아적었다. 식당 안에는 손님이 그리 많지 않았던 탓인지 요리는 빠르게 나왔다. 이슬레이는 먼저 라이퀴아의 앞접시에 음식을 덜어줬다. 라이퀴아는 예의 바르게 잘먹겠습니다- 하는 인사를 하고는 포크를 들었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가 충분히 음식물을 섭취할 때 까지 기다렸다. 딱히 입맛이 없었고, 밖에서 하는 식사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몇번 먹는 시늉을 하다 손을 뗀 채 라이퀴아의 식사만 구경하고 있었다.


 너한테는 먼저 말해야 할 거 같아서 그러는데. 이슬레이의가 턱을 괸 채 무덤덤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나 곧 나갈거야."


 이슬레이의 말에 라이퀴아가 분주하게 움직이던 턱을 멈췄다. 라이퀴아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스푼 끝이 그릇을 긁고, 라이퀴아는 겨우 입안의 음식물을 삼켰다. 이슬레이의 최대 이해자는 선생님이 아닌 라이퀴아였다. 두 사람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단순한 몸짓으로 서로의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 처럼,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말 속에 숨은 의미를 알아차렸다. 이슬레이는 집이 아닌 '가족'을 나가려 하고 있었다. 이슬레이와 라이퀴아는 의심이 많았고, 자신에게 쏟아지는 호의에도 한발짝 물러나는 아이들이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이유 없는 온기를 받을 때면 부담만 커질 뿐이었다.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생각을 이해했다. 정확한 생각을 모두 꿰뚫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슬레이의 부채감은 이해하고 있었다. 라이퀴아는 대꾸 없이 스푼 끝을 씹었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손을 잡아끌어 스푼을 잘근거리지 못하게 하고, 입가를 한번 닦아줬다. 손가락에 스친 입술은 부드러웠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입술이 닿은 손가락을 매만지지 않기 위해 의식하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라이퀴아는 그대로 스푼을 내려놨다. 디저트 시킬까? 이슬레이의 물음에 라이퀴아는 고개를 저었다. 집에 갈래.


 식당을 빠져나온 라이퀴아는 조금 느리게 걸으며 이슬레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보폭이 차이나는 탓에 라이퀴아가 조금 속도를 늦춘 것 만으로도 거리는 금방 멀어졌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라이퀴아는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 형- 이라고 자꾸만 튀어나오려는 목소리를 안으로 삼켰다. 라이퀴아는 부르지 않았지만 이슬레이는 얼마 걷지 않아 뒤를 돌아봤다. 지는 노을 탓에 이슬레이의 몸 가장자리로 붉은 선이 생겼다. 풍경과의 괴리를 만들며 이슬레이가 라이퀴아에게 다시 다가왔다.


 "형, 나 발목 아픈거 같아."


 라이퀴아는 자신의 통증인데도 애매하게 흐리는 말투를 썼다. 이슬레이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라이퀴아의 앞에 한 쪽 다리를 꿇고 몸을 숙였다. 오히려 놀라 움찔하는 라이퀴아의 다리를 붙잡는다. 운동화를 벗기고 바지자락을 걷어올렸다. 라이퀴아의 발목은 거의 한 줌이었다. 멍도 부어오른 기미도 없었지만 가느다란 발목이 움찔움찔 떨리고 있었다. 사다리에서 뛰어내리지 말라니까. 이슬레이가 라이퀴아의 발목을 문지르며 잔소리했다. 라이퀴아는 제 앞에 보이는 이슬레이의 어깨에 손을 기댔다. 안 나가면 안돼? 라이퀴아가 반쯤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라이퀴아도 선생님처럼 가족을 원하고 있었다. 이슬레이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슬레이는 부드러운 손길로 라이퀴아에게 다시 신발을 신겨줬다. 무릎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는 몸을 일으킨다.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얼굴을 마주보지 못하고 제 발끝만 노려봤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마른 등을 어루만졌다. 라이퀴아, 너는 날 이해해 줄 거지? 그 말에 라이퀴아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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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퀴아가 가족의 틀에 들어온지 두 해가 되어가는 겨울이었다. 아이의 깡마른 몸에는 살이 붙었고, 처음 가져왔던 옷들은 길이가 깡총해져 더 이상 입을 수 없었다. 여전히 또래보다 작고 가벼운 덩치였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눈치를 살피느라 분주하게 눈을 굴리는 습관은 없어졌고 대신 눈가를 가늘게 만들며 웃고 다녔다. 너 점점 선생님 닮아간다, 이슬레이가 지나가듯 하는 말에 라이퀴아는 더 활짝 웃고는 했다. 스피어 나이츠 공방 아이들의 손에 반쯤 억지로 이끌려 친구들도 생겼다. 대부분은 알음알음 인사만 하는 사이였지만 일부러 거리를 두기 위해 얼굴을 굳히는 일도 없었다. 메리메리와 레옹이 먼저 졸업을 해 교복을 입게 된 이후로는 주로 엑스트라와 같이 다녔다. 게임에 능숙해진 라이퀴아가 신기록이라도 내는 날에는 한동안 주인공의 호칭이 라이퀴아의 뒤를 따라다녔다. 비숍, 영웅, 용사님- 라이퀴아가 민망함에 몸서리를 쳐 봤지만 그만두기는 커녕 공방 전체가 따라 라이퀴아의 별명을 외쳤다. 종종 반찬을 나눠주러 공방을 찾아오는 에피타이저만 그 놀림에 참가하지 않았기에 라이퀴아는 에피타이저의 뒤에 딱 붙어있고는 했다.


 에피타이저는 아이들을 썩 잘 돌보는 타입이 아니었지만 항상 인기가 좋았다. 귀찮아! 소리를 지르며 집어던지거나 기술을 거는 날도 많았지만 크게 다치는 경우는 없었고, 오히려 아이들은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들이 눈을 빛내며 조르면 기술을 알려주기도 했다. 라이퀴아가 유난히 에피타이저를 따르는 탓에 삐죽거리는 메리메리도 그럴 때는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이거 배워서 사람 패고 다니면 맞는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에도 아이들은 싹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날도 라이퀴아는 에피타이저에게 새로운 관절기를 배우고, 가장 빨리 요령을 익혔다. 한동안 영웅이라고 불리며 놀림받은 것에 대한 복수로- 라이퀴아는 와루캥이 가져다 준 간식을 와작거리며 다른 아이들이 애쓰는 모습을 구경했다. 


 레옹이 복수전을 성공하기 전에 라이퀴아는 자리를 떴다. 곧잘 있는 일이었다. 주말이면 라이퀴아는 점심시간 전후로 집에 돌아갔다. 이슬레이는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었고, 많은 시간을 책상 앞이나 도서관에서 보냈다. 단 한 번도 집안일을 안하겠다는 말은 안했지만 어련히 선생님과 라이퀴아가 이슬레이 몫의 일을 빼앗고 있었다. 평소라면 알아서 한다며 날을 세웠을 이슬레이도 중요한 시험을 앞둔 시점에는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그 시험은 몇일 전에 끝났지만 이제 막 짐 하나를 덜어둔 사람에게 바로 일을 맡기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다.


 "다녀왔습니다-"


 라이퀴아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인사했다. 선생님은 연말이면 항상 바빴고, 이슬레이도 시험이 끝나고 처음 맞은 주말이니 어디론가 외출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라이퀴아의 예상대로 대답은 들리지 않았지만 현관에는 이슬레이의 신발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라이퀴아는 고개를 갸웃하고 신발장을 열었다. 다른 신발들도 제 자리를 차곡차곡 지키고 있었다. 라이퀴아는 던지듯이 신발을 벗어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이슬레이가 책상 앞에 앉아 이마를 짚고 있었다. 형, 귀가 좋은 이슬레이가 자신의 인사를 못 들었다는 것이 이상해 라이퀴아는 이슬레이를 불렀다. 의자에 앉아있던 이슬레이의 몸이 반쯤 돌아갔다. 언제 왔어, 이슬레이의 목소리는 조금 갈라져 있었다. 라이퀴아는 잰걸음으로 이슬레이에게 다가서 이마에 손을 얹었다. 확연히 알 정도로 체온이 높았고,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라이퀴아는 그대로 이슬레이의 팔을 잡아 끌었다. 방 안에 있는 책상에서 침대로 이동하는 것 뿐인데도 이슬레이의 걸음이 갈지자를 그렸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가 이끄는 대로 침대에 걸터앉아 색색 숨을 몰아쉬었다.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옷장을 뒤져 편한 옷을 꺼내 이슬레이에게 집어던졌다. 평소라면 모양 빠지게- 라며 한마디를 했을 이슬레이가 암전히 옷을 받아들었다. 미련하게. 라이퀴아는 자신이 끙끙 앓을 때 마다 들었던 말을 그대로 이슬레이에게 돌려줬다. 이슬레이는 아무런 말도 없이 땀에 젖은 셔츠의 단추를 끄렀다.





 라이퀴아는 곧잘 병치레를 했다. 그리고 아픈 것을 잘 티내지 않는 편이었다. 혼자 끙끙 앓다가 이슬레이나 선생님에게 들켜 혼나고는 했다. 안타깝게도 들키지 않은 적은 없었다. 선생님은 아프면 바로 아이들에게 말을 하고 혼자 추스르는 타입이었고, 들키지 않은 것인지 정말 한번도 아파보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으나- 이슬레이는 좀처럼 아프지 않았다. 아프기 이전에 흐트러진 모습도 드물어서 라이퀴아는 조금 흐트러진 이슬레이의 모습이 신기했다. 라이퀴아의 잔병치레 탓에 상비약은 항상 넉넉했다. 가장 좋은 것은 병원에 가는 것이겠지만- 방 안에서 움직이는 것도 비틀거리는, 머리 하나 이상은 더 큰 사람을 병원까지 데려갈 재주는 아직 초등학교 6학년인 라이퀴아에게 없었다. 선생님에게도 연락을 넣어 봤지만 전원이 꺼져있다는 목소리만 휴대전화 너머로 전해졌다.


 설거지 통이나 식기 건조대나 무언가를 해 먹은 기색은 없었다. 라이퀴아는 일단 물과 이온음료를 가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슬레이는 아픈 와중에도 반듯하게 앉아있었다. 미간이 조금 찌푸려진 채 마른 숨소리만 일정하게 낸다. 라이퀴아가 침대 가에 앉아 매트릭스가 흔들리자 그제서야 이슬레이의 눈이 뜨였다. 라이퀴아가 물을 따서 넘기자 이슬레이는 느리게 그것을 마셨다. 삼키기도 힘겨운 듯 목울대가 크게 한번 움직이고 멈추기를 반복했다. 상태를 봐서는 뭔가를 먹는 것도 힘겨워 보였지만 빈 속에 약을 먹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점심은-"

 "자꾸 들락거리지마. 옮는다."


 라이퀴아의 말을 끊고 이슬레이가 내쫓는 손짓을 했다. 내가 그런 말 할때는 눈도 깜박 안했으면서. 라이퀴아는 불퉁한 얼굴로 방을 빠져나갔다. 라이퀴아가 나가고 나서야 이슬레이는 입을 가리고 밭은기침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다시 열렸다. 들어오지 말라니까, 이슬레이의 잔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라이퀴아가 옆에 앉았다. 상비약과 부드러운 빵이 쟁반에 놓여 있었다. 아주 잠깐 죽이나 스프 같은 것을 직접 요리할까 했으나 라이퀴아는 그런데에 재주가 없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정성을 쏟기에는 자신을 쫓아내는 이슬레이가 얄미웠다. 먹는거 볼 때까지 안나가. 라이퀴아가 빵을 이슬레이의 입가에 들이밀며 말했다. 이슬레이는 얼굴을 잠시 일그러트렸다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그 빵을 받아먹었다. 목 안쪽이 마른 탓에 음식을 씹어 삼키는 것이 힘겨웠다. 잘했어, 라이퀴아가 입을 벌리며 소리없이 웃었다. 눈매가 부드럽게 휘는 모양이 점점 선생님을 닮아가고 있었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가 건네는 약을 받아 입에 머금었다.


 "알아서 먹어, 이제 나ㄱ-"

 "내가 걱정 돼?"


 그걸 말이라고- 이번에는 역으로 제 말이 끊긴 이슬레이가 불쾌한 표정으로 물과 약을 삼켰다. 물을 아무리 마셔도 갈라진 목소리는 잘 돌아오지 않았다. 너 감기에도 엄청 앓잖아, 오늘은 선생님 방에서 자. 이슬레이의 말을 한 귀로 넘겨 들으며 라이퀴아가 이슬레이의 어깨를 눌렀다. 알았어. 알았으면 나가. 형도 나 아플때 꼭 안 나갔잖아. 의미없는 투닥거림이 오가고 라이퀴아는 억지로 눕힌 이슬레이의 몸에 이불을 잘 덮어줬다. 자는 것만 보고 나갈게.


 누구를 닮았는지. 이슬레이가 한숨처럼 말하고는 눈을 감았다. 라이퀴아는 웃으며 빈 페트병과 남은 빵 따위를 한데 모았다. 모두 자신이 받은 일들이었다. 라이퀴아는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누군가를 닮아간다 표현한다면 라이퀴아는 두 사람을 모두 닮아가고 있었다. 열을 재는 조금 서늘한 손, 상냥하지는 않지만 성가실 정도로 신경을 쓰는 태도, 열이 내려 눈을 떴을 때 눈에 보이는 다정한 얼굴. 선생님이라고 생각했던, 열에 들떠 정신이 없는 와중에 맞잡은 손의 온기가 이슬레이 였을 때는 라이퀴아도 조금 놀랐었다. 라이퀴아는 살짝 이슬레이의 손을 잡았다. 옮는다니까, 피곤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이슬레이가 중얼거렸다. 이슬레이는 닿은 손을 한번 꽉 쥐었다 놓았다. 이내 이슬레이의 호흡이 일정해졌다. 라이퀴아는 조심스럽게 이슬레이의 눈 앞에 손을 흔들었다. 평소라면 잠든 와중에도 금방 깨겠지만, 열과 약기운 탓인지 이슬레이는 꼼작도 하지 않았다.


 형, 이제 누가 안봐도 나한테 다정한거 알아? 라이퀴아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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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퀴아가 비에 흠뻑 젖어 귀가한 후 이틀이 지난 주말이었다. 고소한 빵 굽는 냄새에 라이퀴아는 눈을 떴다. 잘 뜨이지 않는 눈을 비비며 침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간다. 이슬레이는 이미 활동을 시작했는지 아래층 침대는 이불이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방 밖에서 일정하게 말소리가 들리는 것이 선생님도 깨어있는 듯 했다. 라이퀴아의 예상대로 두 사람은 부엌에 있었다. 이슬레이는 식탁 앞에 앉아 빵을 씹고 있었고, 선생님은 토스트기의 타이머를 돌리던 참이었다. 저녁 전에는 들어올게요. 그래, 바래다줄까? 아뇨, 오늘 인사 가신다면서요-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목소리들이 라이퀴아의 등장에 끊겼다. 선생님이 먼저 라이퀴아를 알아차리고 시선을 돌리자 이슬레이의 얼굴도 따라 움직였다.


 "라이퀴아, 잘잤어?"

 "어제 늦게 자더니, 일찍 일어났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라이퀴아는 인사에 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이슬레이는 늘 그랬듯이 이른 아침 같지 않은- 말끔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버터, 사과잼. 이슬레이의 말에 라이퀴아가 손가락으로 사과잼 병을 가리켰다. 이슬레이는 먹던 빵을 입에 문 채 토스트에 사과잼을 바르기 시작했다. 사과 알갱이가 노랗게 반들거리는 것이 먹음직스러웠다. 라이퀴아는 그 빵이 접시에 담겨 제 앞에 내밀어질 때 까지 이슬레이의 식사를 신기한 듯 바라봤다. 어떻게 안 흘리지. 라이퀴아가 최대한 이슬레이의 흉내를 내며 조심스럽게 빵을 한 입 베어물었다. 하얀 접시 위에 노릇한 부스러기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우유를 주러 다가온 선생님이 라이퀴아의 입가를 닦아줬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가 빵을 반 쯤 먹어치웠을 때 먼저 일어났다. 라이퀴아가 다급하게 빵을 씹어 삼키고 조금 멘 목소리로 인사했다. 다녀오세요.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머리를 한번 헤집듯이 쓰다듬고는 집을 나섰다. 선생님은 라이퀴아가 식사를 하는 동안 앞치마를 벗고 차를 마셨다. 라이퀴아는 차의 향이 선생님과 꽤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평소 주말과 달리 잘 차려입고 있었다. 오늘도 나가세요? 라이퀴아가 조금 쓸쓸한 얼굴로 컵을 만지작거렸다. 너도 가야지. 선생님이 찻잔을 들어올린 채 말했다. 아침식사의 설거지는 조금 미룬 채 두 사람은 나갈 채비를 했다. 선생님은 손에 종이가방 두개를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 라이퀴아의 손을 잡았다.


 밖은 몇일 전의 폭우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좋은 날씨였다. 편의점은 아침이라고 특별히 더 분주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새벽부터 아침 타임을 맡은 에피타이저의 얼굴에는 피곤이 가득했다. 종이 울리는 소리에 에피타이저는 반사적으로 인사를 했다. 에피타아저는 선생님의 얼굴을 보고 긴가민가한 표정을 하더니 그 옆에 매달린 라이퀴아를 보고 아는 체를 했다. 라이퀴아는 쭈뼛거리는 움직임으로 에피타이저에게 다가섰다. 에피타이저는 피곤한 기색을 최대한 숨기고 상체를 숙여 시선을 맞췄다. 굉장한 말이라도 하는 것 처럼 라이퀴아는 긴장하고 있었다.


 "두유 맛있었어요."

 "푸핫"


 에피타이저가 웃음을 터트렸다. 선생님은 몇번이고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했고 에피타이저는 손사랫질을 했다. 이럴 때만 손님이 없지, 에피타이저는 불만의 말을 겨우 삼키며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가벼운 인사가 오갔다. 애가 단걸 잘먹던데요. 에피타이저는 별 의미 없이 말했지만 선생님의 웃음이 잠시 멈췄다. 그런 내색 한 적 없는데- 선생님은 제 굳은 뺨을 문질렀다. 라이퀴아는 쓸데없이 생각이 많고, 좀처럼 좋고 싫음을 표현하지 않는 아이였다. 에피타이저는 선생님의 표정에 자신의 말 중 실수가 있었나 되짚어 봤지만 짐작이 가는 것은 없었다. 물론 에피타이저의 잘못은 없었다.


 "얘한테 과자 사 준 오빠는 오늘 안와요."


 에피타이저는 능숙하게 대화의 공백을 모르는 척, 화제를 돌렸다. 선생님의 옷자락을 붙잡은 채 얌전히 어른들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라이퀴아가 반응을 보였다. 라이퀴아는 에피타이저의 얼굴을 한번 바라봤다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내렸다. 선생님이 움츠러든 라이퀴아의 어깨를 도닥였다. 에피타이저는 그런 라이퀴아를 보더니 펜과 남는 영수증 하나를 잡더니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한번 여기로 가보세요. 에피타이저가 그린 것은 편의점과 놀이터를 중심으로 한 주변 약도였다. 놀이터의 뒷 편, 얼마 멀지 않은 위치에 별표가 그려졌다. 스피어 나이츠 공방. 동네 사람이라면 오며가며 한번쯤 본 것 같은 기억이 있는 이름이었다. 공방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유능하고 촉망받는 인재인지 여부는 둘째치고- 아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유명하기도 했다. 주택가 한가운데, 탁 트인 낮은 담이라는 조건 덕분에 어른들도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오빠 여기서 지내거든요. 에피타이저가 선생님에게 약도를 건내며 말했다. B초등학교에서 방과후지도하는 사람도 있고, 애들도 많고. 선생님은 에피타이저의 설명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약도를 바라봤다. 사양하는 에피타이저에게 선생님은 끈질기게 종이가방을 건냈다. 그 형 한테도 과자 맛있었다고 말해. 편의점을 나서는 라이퀴아에게 에피타이저가 손을 흔들며 외쳤다.


 스피어 나이츠 공방은 그리 멀지 않았다. 낮은 담에 대문이랄 것이 없이 탁 트여 있었다. 덩치가 큰 남자의 목마를 타고 있던 아이가 먼저 선생님과 라이퀴아를 알아차렸다. 하늘색 머리의 아이는 다리를 까닥거리더니 몸을 앞으로 확 숙였다. 떨어질 것처럼 기울어진 몸을 남자는 능숙하게 받았다. 손님! 알았어- 위험하니까 너무 숙이지 마. 남자는 아이를 제 어깨에서 내리며 말을 덧붙였다. 아이는 제 또래처럼 보이는 라이퀴아를 물끄러미 보더니 건물 안으로 달려가 버렸다. 엑스트라, 인사! 남자가 외쳤지만 돌아보는 기색도 없었다. 남자와 선생님은 어색하게 서로 고개를 숙였다.


 "전에 우리 아이가 신세를 졌다고 들었습니다."

 "네? 아, 아아. 일단 들어오세요."


 남자, 와루캥은 라이퀴아에게 살갑게 웃으며 말했다. 라이퀴아는 와루캥이 손을 흔들어주고 나서야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와루캥은 두 사람을 건물 안으로 안내했다. 건물 안으로 사라졌던 엑스트라는 분홍색 곱슬머리를 한 여자아이와 노란 머리의 남자아이를 데리고 문가에서 라이퀴아를 훔쳐보고 있었다. 쟤 걔 아냐? 놀이터에서 책 읽는- 메리메리가 말 걸고 싶어서 안달났던 애. 이름으로 막 부르지 말랬지. 분홍색 머리의 아이가 엑스트라에게 짜증을 부렸다. 노란 머리의 남자아이는 미간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라이퀴아는 아이들을 무시하려 했지만 노골적일 정도로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에 겨우 '안녕'하고 두 음절을 내뱉었다. 메리메리라는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라이퀴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같이 놀자. 라이퀴아는 곤란한 얼굴로 선생님을 올려다 봤지만 선생님은 말갛게 웃는 얼굴로 라이퀴아를 마주 볼 뿐이었다.


 라이퀴아는 아이들의 손에 2층으로 끌려갔다. 선생님과 와루캥, 그리고 건물 안에 있던 다른 어른들은 말리는 기색이 없었다. 새 친구? 응. 날씨 좋으니까 밖에서 놀지? 레옹이 가져온 게임 같이 하려고. 그래, 화면 너무 가까이서 보면 안된다. 라이퀴아는 그대로 화면 앞에 앉았다. 게임을 처음 해본다는 라이퀴아의 말에 아이들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옹과 라이퀴아가 나란히 컨트롤러를 잡고, 라이퀴아에게 게임을 알려준다는 핑계로 메리메리가 반대쪽 옆에 앉았다. 어른들에게 간식을 받아온 엑스트라는 레옹과 라이퀴아의 뒤에 자리를 잡았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라이퀴아는 불편한 얼굴로 컨트롤러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아이들은 끈질기게 라이퀴아의 옆에 붙어있었다. 라이퀴아는 적당히 피하기를 포기하고 게임에 집중했다. 라이퀴아가 연패를 반복하는 동안 레옹과 메리메리, 엑스트라가 번갈아가며 옆자리를 채웠다. 나 언제까지 해? 라이퀴아가 두번째로 엑스트라와 맞붙게 됐을 때 물었다. 한번은 이겨봐야지! 엑스트라가 개구지게 웃으며 대꾸했다. 메리메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라이퀴아의 입에 간식을 넣어줬고 레옹은 부러운 듯 그 모습을 바라봤다. 라이퀴아는 요령이 좋은 편이었고, 금방 게임기를 다루는 것에 능숙해졌다. 첫 승리는 레옹에게서 따냈다. 메리메리가 라이퀴아를 끌어안았고, 레옹과 엑스트라도 와아- 환호성을 터트렸다. 라이퀴아는 얼떨떨한 얼굴로 자신의 캐릭터가 승리 포즈를 취하는 것을 바라봤다. 축하해, 아이들의 말에 라이퀴아의 뺨이 사르르 풀어졌다. 시끄러운 방안에 노크소리가 울렸다. 살짝 열린 문 틈으로 선생님의 얼굴이 보였다. 라이퀴아는 게임기를 내려놓고 선생님에게 다가갔다. 어느새 시간은 꽤 지나 있었다. 아이들이 아쉬움에 원성을 내뱉었고, 선생님은 미안한 듯 눈썹 끝을 내리며 미소지었다. 아이들은 굳이 내려와 돌아가는 라이퀴아를 배웅했다.


 "다음에 또 놀러와!"





 이슬레이는 아침에 말한 대로 저녁시간이 되기 전에 돌아왔다. 무슨 일인지 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반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슬레이는 허공에 다녀왔다는 인사를 하고는 가방을 풀었다. 저녁 만드는 중인가, 시간을 확인하고 부엌으로 들어가니 선생님과 라이퀴아가 나란히 소매를 걷어올린 채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저녁 메뉴는 햄버그 스테이크로 보였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뒤로 다가가 앞치마 끈을 풀었다. 형, 언제 왔어? 라이퀴아가 고개만 돌려 이슬레이를 바라봤다. 방금. 간단하게 대꾸한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에게 손을 씻게 하고는 자신이 대신 앞치마를 맸다. 선생님은 기분이 좋아보였다. 생글거리는 웃음은 항상 있는 것이었지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것은 드물었다. 굽는 건 제가 할게요.


 "무슨 좋은 일 있었어요?"


 이슬레이의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선생님의 웃음이 한층 더 깊어졌다. 라이퀴아한테 친구가 생겼어. 이슬레이는 그것이 이렇게나 신날 일인가 잠시 고민했다. 정작 라이퀴아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잘 익은 햄버그 스테이크를 담아 각각의 자리에 뒀다. 세 사람은 자리에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라이퀴아 친구 생겼어?"
 "...아마도?"


 선생님의 말과 달리 라이퀴아는 애매한 태도였다. 오늘 즐거웠지? 선생님의 물음에 라이퀴아는 분주하게 움직이던 입을 멈췄다. 동그란 눈동자가 생각에 잠겨 가라앉고, 고개가 기울어졌다. 이내 라이퀴아의 양 뺨이 빨갛게 물들고 눈가가 한껏 부드럽게 휘어졌다. 대답 대신 라이퀴아의 고개가 한번 끄덕였다. 사랑스러운 웃음에 선생님이 라이퀴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슬레이는 불퉁한 얼굴로 라이퀴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라이퀴아는 민망함을 숨기려는 듯 다시 분주하게 손과 입을 움직였다. 그러면 오늘 논 애랑 나랑 누가 더 좋아? 이슬레이가 일부러 심술을 부리며 물었다. 선생님이 제일 좋아. 라이퀴아는 눈도 깜작하지 않고 즉각 대꾸했다. 이슬레이의 손이 덜컥 멈췄다. 라이퀴아는 치켜뜬 눈으로 이슬레이를 한번 바라봤다가 장난스레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형도 좋아. 선생님이랑 형은 특별해. 다 다른 '좋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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