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퀴아는 눈을 떴다. 얼마나 오래 잠들어있는지 모르게 시간이 지나 있었다. 잠들었다 깨어나기를 반복한 탓에 머리는 몽롱했다. 침대에 누운 상태로는 시계가 잘 보이지 않았기에 창가에 들어오는 빛으로 시간을 가늠할 뿐이었다. 창가는 밝게 빛이 들어오거나, 커튼이 드리워진 틈으로 가느다란 빛의 선을 만들거나, 어둠이 짙게 깔렸있었다. 라이퀴아가 또렷하게 눈을 뜰 수 있을 정도로 기운을 차렸을 때는 몇 번째인지 모르게 다시 어두워진 참이었다. 잠이 든 동안 땀을 너무 흘렸는지 몸은 묵직했다. 잠옷 또한 입고 잠들었던 자신의 것이 아닌, 이슬레이의 것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라이퀴아는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슬레이의 옷은 길어서 라이퀴아는 발뒤축을 끌며 걸었다. 라이퀴아는 벽 너머에서 자신을 찾는 소리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에 라이퀴아는 뻑뻑한 눈가를 문지르며 문고리를 한번 붙잡았다가, 이어서 들리는 이슬레이의 목소리에 손을 뗐다. 아직 이슬레이를 마주 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작은 몸이 서늘한 벽을 향해 기울어졌다. 등줄기를 타고 오소소 찬 기운이 올라왔다. 두 사람의 목소리는 의도적으로 낮추고 있는 듯 작았다.


 나직한 목소리는 벽을 넘으며 해체되어 단어 몇개만이 드문드문 남았다. 이슬레이의 목소리가 잠시 커지는가 싶으면 상냥하게 조곤거리는 목소리가 그를 달랬다. 라이퀴아가 기억하는 두 사람의 중요한 대화는 거의 그런 식이었다. 목소리를 크게 높이지 않고 단 둘이, 실수로라도 높아진 목소리에 라이퀴아가 놀라기라도 할까봐. 그 행동들은 무의식이었고 라이퀴아에게 있어 한없이 다정한 이유였지만 동시에 라이퀴아의 입을 틀어막기에는 충분했다. 라이퀴아는 어른들의 대화에 아무런 발언권도 없었고, 감히 자신이 말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이는 늘 그랬던 것 처럼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숨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꼭 나가야겠니? 자신이 했던 말과 꼭 같은 말을 하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라이퀴아는 입술을 악물었다. 내가 정말 선생님같은 말을 했구나, 하고 웃어야 할텐데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숨소리도 심장박동도 너무 크게 느껴졌다. 라이퀴아는 목 안쪽이 간질거리는 것이 기침으로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잠시 숨을 멈췄다. 열이 올라 먹먹해진 귀에 이명이 들렸다. 전 선생님과는 달라요. 귀울림이 숨소리와 심장이 뛰는 소리를 먹어치우고 이슬레이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했다. 라이퀴아는 자기도 모르게 문에서 한발짝 뒤로 물러났다. 심장소리는 점점 더 빨라지고 숨은 참을 수 없이 가빠져왔다. 라이퀴아는 선생님이 이슬레이를 붙잡기를 원했다. 그런다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셋의 관계에 대한 생각은 잠시 내려놓고, 조금 더 이슬레이에게 장난을 치고 선생님께 응석을 부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가족놀이 같은 거, 더는 못 해먹겠어요."


 라이퀴아는 이슬레이가 자기 자신을 향해 말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애초에 당신이랑은 달라요. 라이퀴아는 이슬레이가 선생님을 향해 당신이라고 부를 때,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인지 갈비뼈 안쪽이 아팠다. 라이퀴아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만할래요.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목소리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천천히 다시 침대를 향했다. 제 몸에 맞지 않는 바지가 척척 발에 채이며 라이퀴아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라이퀴아는 기어코 바짓단을 밟아 땅 위를 굴렀다. 침대 옆 낮은 서랍장에 라이퀴아의 무릎이 닿았고, 그 위에 놓여있던 약과 물컵은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에 라이퀴아의 몸이 바짝 굳었다. 라이퀴아는 두 사람이 아무런 소리를 듣지 못했기를 바랐지만 그 바람과 달리 다가오는 걸음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렸고 문 틈으로 밝은 빛이 들어왔다. 어두운 방 안에 익숙해져 있던 라이퀴아는 눈가를 조금 찌푸렸다. 라이퀴아, 자신을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에 라이퀴아는 등을 움찔거렸다. 움직이지 마, 유리 밟는다. 라이퀴아는 자신을 안아올리는 몸이 선생님인지 이슬레이인지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다. 다만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고 축축 늘어지는 몸은 무엇이든 기댈 것이 필요했다. 라이퀴아는 자신을 안아든 사람이 이슬레이가 아니기를 바라며 그 목을 끌어안았다. 라이퀴아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라이퀴아를 안아올린 사람은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어린 아이를 달래듯이 라이퀴아의 귓가에서 쉬쉬거렸고, 땀에 조금 젖어있는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세상에- 울었니, 라이퀴아?"


 라이퀴아는 선생님이 자신의 눈가를 쓸어내리며 물어보는 순간까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라이퀴아는 긍정이든 부정이든 선생님의 목소리에 대답하려 했지만 목에서는 마른 기침만 튀어나왔다. 커다란 손이 라이퀴아의 등을 부드럽게 다독였다. 선생님은 매달리는 데에도 힘이 없이 미끄러지는 라이퀴아의 몸을 능숙하게 한번 추어올렸다. 이슬레이, 내일 마저 얘기할까. 라이퀴아는 자신이 들을 이야기가 아니라는 듯 일부러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는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매달린 손에는 절로 힘이 들어갔고, 선생님의 셔츠에는 가느다란 주름이 잔뜩 생겼다. 괜찮아, 내일 병원에 가자. 지금은 더 자렴. 라이퀴아는 자신의 관자놀이에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을 느끼며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모든 과정은 이슬레이의 생각보다는 느리게, 라이퀴아의 예상보다는 빠르게 지나갔다. 이슬레이의 짐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책 따위는 졸업과 함께 대부분이 내다 버리는 것이었고, 옷들도 그의 성장을 따라가지 못한 것을 제외하면 몇 개가 남지 않았다. 이슬레이의 삶은 집안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으나 그것이 집안에 남은 전부였다. 이슬레이는 방 안에서 마치 이방인처럼 서 있었다. 새로 산 듯 보이는 롱코트는 마치 이슬레이의 몸에 맞춘 것 처럼 잘 어울렸다. 라이퀴아는 문지방에 서서 그런 이슬레이를 바라봤다. 이슬레이는 낯선 얼굴로 침대가 빈 공간과 옷장, 책상과 책장, 그리고 천장의 무늬까지 천천히 뜯어보고 나서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간이 올라가며 눈썹 위로 작게 주름이 생겼다. 아, 이제 다 후련하다.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그 목소리를, 그 웃음을 기억에 새기기 위해 눈을 떼지 않았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에게 고맙다고 속삭인 후에야 집을 떠났다. 가. 라이퀴아는 이슬레이를 처음 만난 그 날 처럼 선생님의 뒤에 제 몸을 숨긴 채 말했다. 잘이라는 수식어도, 형이라는 살가운 호칭도 떼어낸 작별 인사였다.





 소년은 자란다. 그는 이슬레이를 마중할 때가 되어서야 이슬레이의 키가 자신과 비슷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착이 늦어진 새 침대탓에 그와 같은 침대를 쓰고 있는 라이퀴아도, 많이 자라있었다. 처음 함께 잤을 때는 라이퀴아의 베개를 나린히 베고 누우면 발 끝이 허벅지에 닿을 정도였으나, 지금은 무릎이나 그 아래쪽에 닿을 것 같았다. 그는 불편하게 침대 가장자리에 바짝 붙어 누워있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동그란 뒤통수 아래로 마른 목줄기가 불편해보일 정도로 움츠러들어 있었다. 떨어지겠다. 그는 속삭이며 라이퀴아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아뇨, 선생님, 놀라 바둥거리는 것 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라이퀴아의 정수리를 턱으로 누르며 바둥거림을 제압하고 몸을 더 당겨 안았다. 라이퀴아는 많이 자랐지만, 여전히 조금 높은 체온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아직 미열이 남아있을 뿐 그 마저도 달라졌을지 모를 노릇이었다. 아이들이 언제 자라는지 모르게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쓸쓸하게 만들었다. 


 "쓸쓸해서 그래, 조금만 이러고 있자."


 라이퀴아의 움직임이 덜컥 멈췄다. 망설이는 것 처럼 라이퀴아는 조금 굼뜨게 바르작거리다가 곧 움직임을 멈췄다. 작은 몸은 금방 그가 힘으로 누르고 있지 않아도 될 정도로 힘을 빼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손에서도 힘이 빠졌다. 그는 자세를 고쳐 라이퀴아를 좀 더 부드럽게 안았다. 허리 앞에서 모아 깍지낀 두 손은 힘껏 끌어안은 것 보다 라이퀴아의 숨통을 틔웠다. 라이퀴아는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던 자세를 고쳐 몸을 돌렸다. 얌전히 자신에게 기대오는 작은 몸에 그는 머리를 쓸어넘겨주고, 뺨을 쓰다듬고, 목덜미를 매만졌다. 조금만 천천히 커. 그는 실없는 말을 하며 라이퀴아의 목덜미에 머리를 문질렀다. 마른 목덜미 아래로 맥박이 뛰는 소리가, 어쩌면 뼈가 자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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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이상적인 아이였다. 수려한 용모, 단정한 옷차림. 태도는 나긋했고, 우수하다는 수식어는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 아이의 행동이 주변 어른들의 눈에 거슬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그 애가 괜히 그랬겠어요'라는 말을 듣는 것이 이슬레이였다. 어른들의 상상 속 이상적인 아이. 주변에 모이는 사람은 끊이지 않았지만 투명한 벽이 있었고, 그 벽이 이슬레이에게 묘하게 압도적인 인상을 부여했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이슬레이는 만화나 소설 속에서 튀어나온 사람이라고 해도 믿겨질 정도였다. 스스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이용하기까지 했다. 사실상 이용하기 위해 모든 것을 쌓아왔다 해도 틀리지 않았다. 다만, 모든 것을 쌓는 과정이 어렵지 않을 정도로 우수했을 뿐. 지나치게 영리한 아이는 자신이 모르는 것이 없다는 착각에 빠지고는 했다. 부딪치고 깨질 구석이 없는 아이는 더욱 그랬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예민함을 좋아했다. 그것은 선생님과 아이들 사이를 나누는 분명한 경계였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사랑했고, 아이들 역시 그랬다. 선생님의 사랑은 너무도 다정했기에 아이들은 그 다정함에 매달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은 아이들만의 비밀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비밀은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다. 라이퀴아가 시비를 걸어온 동네 아이를 울린 일, 실수로 공방의 유리창을 깬 일 등- 작은 악행들은 모두 이슬레이만이 알고 있었다. 선생님에게는 쉽게 하지 못하는 투정도 이슬레이에게는 허락됐다. 라이퀴아는 여전히 사람을 경계하면서도 선생님과 이슬레이에게는 부드럽게 풀어졌다. 라이퀴아의 눈이 부드럽게 미소짓는 순간은 아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라이퀴아가 무게를 실어 팔에 매달리고, 장난을 치는 것은 오직 이슬레이 뿐이었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그런 모습을 알고 있는 유일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자신은 특별하다는 우월감. 라이퀴아에게 있어 선생님과는 다른, 중요한 존재라는 확신. 라이퀴아의 그런 태도는 이슬레이의 착각을 부추겼다. 이슬레이는 함부로 자신이 라이퀴아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라이퀴아는 자신과 다를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레이는 감히 라이퀴아가 상처받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슬레이는 함부로 라이퀴아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라이퀴아 또한 자신을 다 알고 이해할 것이라고.





 라이퀴아가 이슬레이의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교복이 담겨있는 종이가방만이 이슬레이의 걸음을 따라 흔들리며 한두번 부딪치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이슬레이의 몸에서 내려온 라이퀴아는 이 집에 처음 온 날처럼 조금 굳은 뺨으로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라이퀴아의 손은 이슬레이의 옷자락을 잡을 듯 뻗었다가 허공을 쥐며 멈추었다. 이슬레이는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가 외투를 걸어두었다. 라이퀴아는 현관에 걸터앉아 한박자 느리게 신발을 벗었다. 검은 눈동자가 특별할 것도 없는 현관을 의미없이 관찰했다. 이슬레이의 신발은 문 밖을 향해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현관의 센서등이 꺼지며 순간 어둠이 찾아왔다. 딸깍, 스위치를 누르는 소리와 함께 라이퀴아의 등 뒤가 밝아졌다. 뒤에서부터 뻗어진 커다란 손이 라이퀴아의 이마를 짚었다. 인기척에 현관 센서등에 다시 빛이 들어왔다. 라이퀴아의 이마는 조금 축축했다. 이슬레이의 손은 그대로 라이퀴아의 이마를 훔쳐내는 듯 하더니 둥근 뺨과 목덜미에 이어 손을 가져다댔다.


 "...열나네."


 검은 고수머리는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가 이슬레이의 손이 닿은 모양을 따라 헝크러졌다. 이슬레이는 멍하니 서 있는 라이퀴아의 몸을 잡아끌었다. 라이퀴아의 발에 반쯤 걸쳐져 있던 신발 뒷축이 끌리며 내팽개쳐졌다. 한번 타일 바닥에서 달각이며 튀어오른 신발은 가지런한 이슬레이의 신발을 밀어냈다. 한 짝은 이슬레이의 신발 앞에 가로놓이고 다른 한 짝은 이슬레이의 신발 위를 덮었다. 라이퀴아는 이슬레이가 라이퀴아의 외투를 벗겨내는 동안 그 신발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센서등이 꺼지고 나서야 라이퀴아는 고개를 돌렸다. 모양 좋은 눈썹이 조금 일그러진 채 라이퀴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손이 얼음장보다 더 차갑게 닿는 것을 깨닳고 나서야 자신의 열을 알아차렸다. 라이퀴아는 열 탓에 마른 입안을 혀로 훑었다. 입안에서는 조금 단내가 나고 있었다. 이슬레이는 어울리지 않게 부산을 떨며 욕실과 거실, 방 따위를 돌아다녔다. 욕실의 난방을 켜두고, 방에서 잠옷을 꺼내왔다. 오며가는 동안 틈틈이 라이퀴아의 이마를 쓸어내렸고 증세를 물었다. 라이퀴아와 눈을 마주칠 때면 서늘한 색의 눈동자가 얼핏 다정하게도 보이는 빛을 띄었다. 혼자 씻을 수 있겠어? 라이퀴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슬레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욕실로 향하는 라이퀴아의 뒤를 따랐다. 그러지마, 라이퀴아는 목소리를 내려고 했으나 열기를 띈 숨소리만 갈라진 채 새어나왔다. 결국 라이퀴아는 말 대신 욕실 안에 들어가 문을 걸어잠그는 것으로 대답했다.


 라이퀴아는 따뜻한 물을 머리 위로 끼얹었다. 개운한 기색 없이 물을 끼얹을 수록 몸의 열만 오르는 것 같았다. 어질어질한 머리 탓에 라이퀴아는 느린 동작으로 몸을 씻었다.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훔쳐내고, 머리를 털었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 탓에 몸에는 여전히 축축한 물기가 남아 있었고, 그런 상태에 입은 잠옷은 기분나쁘게 몸에 달라붙었다. 라이퀴아는 찝찝한 얼굴로 욕실을 나갔다. 거실에는 이슬레이가 꺼내둔 약과 물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라이퀴아는 그것들을 못본 척 하며 소파 위로 몸을 눕혔다. 머리가 복잡한 탓에 이슬레이가 있는 방으로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가 본질적으로 자신과 더 같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라이퀴아는 이슬레이도, 스승님도 아닌 라이퀴아였다. 스승님만큼 호인도 이슬레이만큼 이상적인 아이도 아닌 라이퀴아.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에게는 상처가 되지 않을 일에도 상처받을 수 있는 아이였다. 이슬레이에게 라이퀴아는 이해자였지만, 라이퀴아에게 이슬레이는 이해자가 되어주지 못했다. 형, 라이퀴아는 입 안으로 단어를 중얼거렸다. 이슬레이 형, 라이퀴아의 입술은 소리없이 달싹거리며 움직였다. 라이퀴아의 부름은 아무런 소리도 없었지만 그에 반응하는 것 처럼 방의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라이퀴아는 잠에 든 척, 눈을 감았다. 문의 경첩이 움직이는 소리, 다가오는 발소리,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조금 차가운 손.


 "약도 안 먹고, 머리도 안 말리고."


 작게 한숨소리가 들렸다. 라이퀴아의 등 뒤로 이슬레이의 팔이 들어왔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상체를 받쳐 안았다. 라이퀴아는 많이 자라고도 이슬레이보다 한참이 작았고, 가벼웠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를 앉혀둔 채 마른 수건과 헤어 드라이어를 가져왔다. 형, 라이퀴아가 눈을 뜨며 이슬레이를 불렀고, 이슬레이는 라이퀴아가 잠들어있지 않았다는 것에 놀라는 기색도 없이 대꾸했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머리 위로 마른 수건을 덮었다. 머리카락에서 방울져 떨어져 뺨을 적신 물을 꼼꼼하게 닦아냈다. 꺼내둔 약을 먹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라이퀴아는 알록달록한 캡슐과 이슬레이를 번갈아 바라봤다. 혼자서 아파야 하는데. 라이퀴아의 손이 꼼지락거리는 것에 따라 손 안에서 캡슐이 굴렀다. 


 "꼭 나가야 해? 우리는 가족이잖아"

 "선생님 같은 말을 하네."


 라이퀴아는 열에 목 안쪽이 마른 탓인지, 아니면 불안감 탓인지 쥐어짜내는 듯이 겨우 말했고, 이슬레이는 주저없이 대꾸했다. 이슬레이의 말에 라이퀴아는 입을 다물었다. 선생님과 자신은 다르다는 듯한 목소리. 라이퀴아는 선생님이 가족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순간들을 떠올렸다. 발 끝까지 온기가 도는 듯한 다정한 말. 이슬레이는 그 말들을 선생님 같다고 표현했다. 마치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한- 라이퀴아는 생각을 억지로 없애지도, 더 이어나가지도 않으며 약을 입에 머금었다. 너는 날 이해해 줄 거지? 이슬레이가 길에서 물었던 말을 라이퀴아는 다시 곱씹었다. 이해해주지 않는 나는 싫어? 라이퀴아는 그 생각을 말로 내뱉는 대신 약을 삼켰다. 이슬레이를 붙잡고 싶은 마음과 떠나려는 것에 대한 원망, 그런 원망에도 불구하고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혼란스럽게 섞여 들었다. 라이퀴아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마른기침만 했다.


 이 날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침대를 빌렸다. 본인은 원하지 않았지만 이슬레이가 억지로 라이퀴아를 자신의 침대에 잡아눌렀다. 발목 아프다며, 열도 나고 위험하니까 1층에서 자. 이슬레이의 말에 라이퀴아는 그 정도는 아니라며 잠시 몸부림을 쳤지만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어깨를 힘있게 잡아누를 뿐이었다. 이슬레이는 누운 라이퀴아의 옆에 잠시 앉아있었다. 서늘한 손이 약기운을 확인하며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이슬레이가 몸을 일으키자 매트리스의 용수철이 끼그덕거리는 소리를 냈다. 라이퀴아는 약기운이 올라 조금 몽롱해진 눈으로 이슬레이를 바라봤다. 이슬레이가 방 밖으로 나가는 뒷모습을 붙잡지 않기 위해, 이슬레이를 형이라 부르지 않기 위해, 투정을 부리지 않기 위해- 라이퀴아는 입안의 여린 살을 짓씹었다. 아직 어린 라이퀴아는 이제 혼자 아프는 법을 배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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